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 피해자에 관한 2018년 대법원 판결 등과 관련한 한일 간 갈등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제3자 변제 방식의 해결책 제시와 미래 지향의 한일 관계 주장으로 완화되고, 양국 간의 우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일 간에는 과거사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 등 휘발성을 가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부침은 있겠지만 갈등 관계가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이사 갈 수도 없는 이웃이라면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객관적 사실관계와 국제 규범에 터 잡아 서로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밖에요.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생각 몇 대목입니다.
한국 측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과거에 여러 번 사죄하였고 특히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현세대에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위한다면 양측 모두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한국 측은 오부치 총리나 간 나오토 총리 등의 사과와 반성의 메시지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일본 측은 끝없이 반성하고 사죄하는 독일의 경우를 참고해야 합니다.
다음 떠오르는 생각이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입니다. 이는 라틴어 법 격언으로,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민법 등 국내법과 국제법의 대원칙입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나갈 것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양국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합치된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양국은 한국의 무효 입장과 일본의 유효 입장을 “이미 무효”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각자 자국의 입장에 맞게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부동의에 동의(agree to disagree)”하는 방식으로 절충하였습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청구권 자금 일괄 지급을 요구하면서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또는 배상이건)은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한국 정부는 1975년 실제로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였고, 2006년에는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6500여 억원을 추가로 보상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측으로서는 강제 동원 피해를 일본 측에 더 이상 청구하지 않는다는 뜻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12년 강제 동원 피해자의 개인적 청구권은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거나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국가가 이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법적 논리를 구성하여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피해자 승소 판결을 하였고 그 판결은 2018년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강제 동원 피해를 한국 정부가 책임지기로 한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에 정부가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국가 위신과 또 다른 국익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생각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인 조선통신사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7년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도 안 된 1607년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1811년까지 12차례나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국토를 유린하고 국민을 살상한 일본과 이처럼 빨리 국교를 재개하고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등의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니, 조선 사람은 밸도 없나, 이 무슨 꼴이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상관없다며 국교 재개를 간곡히 요구하고, 조선으로서도 당시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강성해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후방에 있는 일본과의 관계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 입장에서도 집권하긴 했지만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불안한 상태라서 국제적 신망을 얻어둘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교는 이러한 것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외교가 지향하는 바는 완승 완패가 아니라 각국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51대49의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