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따라 몸이 기억하고 앞서 반응하는 음식이 있다. 무논에 빼곡히 들어찬 모들이 초여름 산들바람에 흔들릴 무렵, 고향 마을 어귀에 정차한 생선 트럭에서는 요란한 호객 방송이 울려 퍼졌다. 여수나 목포에서 출발해 내륙 한가운데까지 실려 왔다는 생선들은 비린내로 동네를 들썩였다. 갈치, 고등어, 조기 무리 속에서 자태만으로 철부지의 시선을 끌기 충분한 생선이 병어였다.
농어목 병어과의 병어는 생선계의 베이글남, 베이글녀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몰려 있는 작은 머리와 통통한 몸매의 대비는 극명하다. 마름모꼴 몸통과 꼬리지느러미를 잇는 허리는 잘록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백색은 북태평양 심해에서 겨울을 나던 병어가 산란을 위해 몰려오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다 빛을 닮았다. 병어는 지역과 크기에 따라 ‘자랭이’ ‘병치’ ‘덕자’로도 불린다. ‘덕대’는 병어와 구분되는 유사종이지만, 섞어 부르는 이들도 있다.
병어는 해양수산부가 매달 선정해 발표하는 이달의 수산물이다. 산란기를 앞둔 이맘때 병어는 살이 차고 영양도 절정에 이른다. 회로도 먹지만 뭍에 오르자마자 죽기 때문에 활어회보다는 선어회가 제격이다. 무침이나 구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병어의 부드러운 살과 감칠맛을 제대로 즐기자면 조림만 한 조리법이 없다.
병어조림에 감자가 빠질 수 없다. 병어가 북상할 무렵 꽃을 피우기 시작한 하지 감자도 이맘때 꽃을 떨구고 씨알이 영글기 시작한다. 햇감자를 바닥에 깔고 두툼한 병어를 올린 뒤 고추장과 고춧가루, 간장과 맛술, 채 썬 고추와 양파, 다진 마늘 양념을 얹어 졸여낸 매콤달콤한 조리법이 정석이다. 감자 대신 무를 써도 좋지만, 무에서 배어 나오는 달짝지근한 맛은 호불호가 갈린다. 병어 속살 한 숟가락을 입에 물면 ‘자산어보’에서 왜 병어를 단맛이 나는 생선이라고 했는지, 영어로는 왜 ‘버터 물고기(butterfish)’로 부르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병어가 산란처를 찾아 인근 갯벌에 떼지어 몰려드는 목포와 신안 일대에는 병어조림 맛집들이 즐비하다. 여러 해 전 지인들과 어울려 목포에서 주말을 보낼 때, 일행에게 집을 숙소로 내준 지인이 첫날 저녁 안내한 곳은 동부시장 바로 옆 ‘나나네집’(전남 목포시 동부로11번길 17-2)이다. 갈치조림, 생선모둠구이, 소라초무침, 낙지볶음과 연포탕의 유혹을 뿌리치고 선택한 병어조림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손맛을 불렀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생선 트럭에서 고르고 고른 도톰한 병어로 조리한 그 병어조림의 맛이었다.
시장과 병어조림은 어울리는 조합이다. 서울에서 병어조림으로 식객들, 특히 인근 인쇄업 종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는 곳 가운데 하나가 인현시장 먹자골목에 자리한 ‘진미네’(서울 중구 마른내로6길 34)다. 같은 시장에서만 세 번 장소를 옮겨가며 30년 넘게 해산물 요리를 내고 있는 인현시장 터줏대감이다. “이것저것 주문 가능합니다.” 메뉴판 하단에 적힌 이 문구야말로 노포의 영업 비밀을 일러준다. 계절과 조업 상황에 맞게 공수받은 각종 해산물들이 스티로폼 박스에 올려지고, 손님이 선택한 재료와 조리법에 맞춰 안줏거리를 만든다. 요리마다 업력이 느껴지고 덤으로 주는 순대나 총각김치마저 호평 일색이지만, 진미네를 오늘까지 이끈 메뉴는 단연 병어조림이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손님들 테이블에도 어김없이 병어조림이나 병어회가 안주로 올려져 있다. 맞은편에는 아들이 주방을 맡은 새 가게가 문을 열었다.
병어조림으로 식사 메뉴를 정했다면 사전 문의가 필요하다. 최근 어획량은 급감하고 수요는 늘면서 여러 식당들이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진미네처럼 사철 병어를 내는 곳마저도 가격은 ‘시가’이다.
맛의 절반은 추억이고, 추억의 절반은 또 맛이라고 한다. 공감을 부르는 말이다. 이번 주말에는 노모를 뵙고 병어조림을 대접해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