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꼭 의대에 보내고 싶은데요.”
“몇 학년이죠?”
“초등학교 1학년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의대반으로 보내세요. 저희가 스페셜하게 관리합니다.”
일곱 살에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나라가 있을까. 대한민국 이야기다. 아무리 의대 광풍 시대라지만, 전국 곳곳 초등학생 대상 학원이 아예 간판을 “초등 의대반” “초등 의대관”으로 고쳐 달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3~4학년을 겨냥하던 학원들은 “더 일찍 준비해야 한다”며 초등 1학년생에게도 레벨 테스트를 권유하고 있다.
다음 달 ‘의대반’을 신설하는 한 학원은 “문의 전화가 빗발친다”고 했다. 커리큘럼을 물으니, 다음 주 ‘초등 의대 학부모 설명회’에서 비공개로 원장 직접 강의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 설명회도 선착순 30명만 들을 수 있다. 당일 아이를 데려오면 국어, 영어, 수학 레벨 테스트를 보고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고.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초등학생 1학년도 가능한가요?” “네. 어머니. 중학교 1학년 정도 수학만 뗐다면 당연히 입학 가능하고요. 그런 학생들이 이미 대기 중입니다. 소수 정예 6명만 받아요.”
◇유치원생이 ‘수학의 정석’을 푼다고?
사교육의 메카로 불리는 서울 강남 대치동 유명 학원장은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 나와 초등 의대반 실태를 털어놨다. 이 반에 들어가려고 방학 땐 지방에서도 올라온다고. 이 원장은 “들은 것까지 종합하면 제주도, 부산, 목포, 대전 등에서 온다”며 엄마와 동행한 아이들은 근처 원룸을 빌려 생활한다고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극성인 부모들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수학의 정석으로 미·적분까지 다해서 보낸다”는 얘기였다. 보통 고등학교 때 푸는 그 정석 말이다.
초등 의대 열풍은 서울 전 지역, 경기, 인천뿐 아니라 부산, 경상, 전라, 충청 등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북 구미의 한 학원은 “이른바 ‘의치한약수’(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를 간 아이들은 초등 때 무슨 공부를 했을까”란 간판을 내걸고 초등 1~6학년을 대상으로 한 ‘초등 의대 선발 고사’를 진행 중이다. 충남 홍성군 한 읍의 수학학원도 올해 초부터 초등의대반을 운영 중이다. 지방 학원이 이름에 ‘SKY(서울대, 고대, 연대)’ ‘대치’ 등의 단어를 썼던 것처럼 ‘의대반’도 유행이 된 셈이다.
서울 목동의 한 학원 초등 의대반 시간표에는 방학 때 하루 3시간짜리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었다. 학원비는 3시간에 5만원. 일주일에 두번 간다면 40만원꼴이다. 학생들은 수학 시간에는 올림피아드 상위 3% 문제를 풀고, 과학 시간에는 자체 교재를 통해 물리, 화학, 생물, 지리를 중심으로 한 응용 심화 풀이를 한다. 5학년 아들을 초등 의대반에 보내고 있는 엄마 김모씨는 “요새 애들은 ‘학원 몇 개 다녀?’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수학 학원 몇 개 다녀?’라고 묻는다”며 “수학 학원만 3개씩 다니는 애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아들은 벌써부터 ‘엄마, 가 문제 푸는 거 보면 나는 의대는 못 가’라고 말한다. 안쓰럽지만 어쩌겠나”라고 했다.
초등생이 어려운 수학, 물리 문제를 푸는 모습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약대가 목표인 초6의 17시간 공부 브이로그’ ‘의대생을 꿈꾸는 10살 공튜버(공부+유튜버)의 하루 일상’ 같은 제목의 영상이 많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초등생들이 ‘ㅇㅇ의대 30학번’ 등의 목표를 공유하며 ‘공부 인증샷’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초등부 의대반 선발고사 문제에 “저도 명문대 나왔는데 첫 줄 읽다가 포기했네요”란 댓글이 달려 있다. 입시 관련 채널인 ‘가갸거겨고교’에 있는 ‘미국 수학 경시대회 푸는 초등 의대반 수업 현장’ 영상에서도 서울대 의대생이 12세, 7세 초등생의 문제 풀이를 보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 중 한 명은 “왜 의사가 되고 싶냐”라는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초등생 5명 중 1명은 의대에 가고 싶어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메가스터디교육이 지난달 10~24일 초등 4~6학년 5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23.9%가 의학 계열 진학을 원했다. 그 뒤로는 ‘아직 못 정했다’는 답변이 22.5%, 자연·과학 계열 15.1%, 공학 계열 12.2%, 인문사회 계열 8.2%, 예체능 계열 7.6%, 사범·교육 계열 6.2%, 상경 계열 2.4% 순이었다.
◇맘카페선 “체계적 교육” VS. “아동 학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초등 의대반을 두고 설전이 벌어진다. 찬반이 명확하게 나뉜다. 찬성 쪽에서는 “자극적으로 ‘초등 의대반’으로 지은 것일 뿐 수업을 보면 영재반 같은 느낌”이라며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게 왜 나쁜지 모르겠다”고 한다. 한 엄마는 “저 지금 중딩 맘인데 어릴 때 많이 안 시킨 거 너무 후회한다”며 “영유도 보내고 수학 선행도 시키세요. 뒤늦게 따라가려니 힘듭니다”라고 썼다. 전국 의대 정원은 3000명대 초반(2023학년도 기준), ‘의치한약수’ 전체로 늘리면 6000명대인데 “재수, N수를 해서라도 갈 수만 있다면 누가 안 보내겠냐”라는 입장이다. 의대 진학을 인생 역전 기회로 봤다.
그러나 반대 쪽은 “의대 진학은 아이의 목표가 아니라 부모의 목표 아니냐”며 “요즘 아이들은 자라는 게 아니라 키워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대체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무슨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아동 학대란 의견도 상당했다. “결국 어릴 때부터 돈 많이 버는 의사가 최고라는 걸 알려주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의대 쏠림 현상은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 서울대 신입생 중 휴학생이 많아지는 이유도 의대, 치대 진학을 위한 수능 재수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그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서울대 신입 휴학생은 2019년 70명, 2020년 96명, 2021년 129명, 2022년 195명, 2023년 225명으로 늘었다. 4년 만에 3배로 뛰었다. 20대뿐 아니라 3040세대도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봐서 의대에 진학하려는 꿈을 꾸기도 한다. 3년째 의대 진학 공부를 하고 있는 40세 미혼 여성 이모씨는 “사범대를 나와 교사를 할 때 월급 200만~300만원을 받았다”며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답답해 다시 수능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의대를 졸업하면 50대일 수도 있지만 정신과 의사는 80세까지 한다더라”고 했다.
한 맘카페에서는 지난 13일부터 무기명 여론조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선 최고 인재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란 질문에 9%만이 “의대에 가야 한다”고 응답했다. 75.8%가 “이공계로 가야 한다”고 했다. 15%는 “문화, 예술, 인문학 등 각자 재능 있는 분야에 진학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내 아이가 내신이나 모의고사 1등급 초반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하자 “의대에 보낸다”가 80%였다. “이공대 진학”은 20%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