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국 전 법무장관이 ‘길 없는 길’ 운운하면서, 정치권은 그의 내년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선 쌍수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도 포착된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돼 가는 중이다. 조 전 장관은 자녀 입시 비리 로 재판을 받고 있다. 서울대에서도 파면됐다. 아내는 같은 일로 징역 4년형을 받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딸은 의사 일을 그만두고 유튜버로 변신했다. 그런 그가 퇴임 후 경남 양산에 살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나자 ‘양산 출마설’까지 돈다. 여권에선 그런 그를 “파렴치” “과연 양심이 있느냐”고 한다.
◇1심 실형→교수직 파면… 다음은 출마?
조 전 장관은 지난 2월 자녀 입시 비리 혐의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을 무마한 혐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3일에는 서울대에서 교수직 파면 결정을 통보받았다. 조 전 장관은 법원 판결과 서울대 결정에 모두 불복, 각각 항소한 상태다.
야권 관계자는 “조 전 장관이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내년 출마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안다”며 “신호탄격으로 ‘길 없는 길’이란 메시지를 낸 것”이라고 했다. 조 전 장관의 양산 방문에 동행한 황현선 더전주포럼 대표(전 청와대 선임행정관)는 본지 통화에서 “조 전 장관이 ‘이제는 뭔가 다른 일을 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서 “조 전 장관은 현재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상황으로, 몇몇 얘기에 대해서는 제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도 한다”고 전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조 전 장관이) 재판, 수사 과정에서 방어권을 획득하기 위해, 그리고 민주당 내 강경파와 친문 세력을 결집하는 구심점이 돼 차기 대선을 노리기 위해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장성철 공감센터 소장은 “조 전 장관은 정치로 명예를 회복하려는 생각이 강하다”며 “하지만 ‘조국의 강’ 프레임에 대한 우려 때문에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길이 뭐가 있겠나. 그가 말한 ‘길 없는 길’은 본인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신당을 창당하거나 무소속 출마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복수 야권 관계자는 조 전 장관이 내년 총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갑에 출마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재인 정부의 ‘황태자’로 불린 조 전 장관이 택할 만한 상징성 있는 지역구라는 평가와 함께, 그가 문 전 대통령을 양산에서 만난 뒤 ‘길 없는 길’을 언급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양산갑은 국민의힘 윤영석 의원(3선)의 지역구로, 민주당 입장에선 험지에 속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험지인 데다가 PK(부산·경남) 지역이기 때문에, 조 전 장관의 출마가 ‘조국의 강’ 프레임의 역풍이 우려되는 수도권 선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 전 장관의 현재 거주지인 서울 관악갑, 그의 고향인 부산, 그의 일가가 운영한 사학법인 웅동학원이 있는 경남 창원진해구 등도 출마 예상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다.
◇“정치에는 최소한의 금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전 장관이 내년 총선에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절반 가량에 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16일 나왔다. 여론조사업체 미디어토마토가 12~14일 성인 1037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47.5%는 조 전 장관의 출마에 ‘반대한다’는 답을, 41.8%는 ‘찬성한다’는 답을 내놨다.
여야는 유불리를 계산하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민주당 내에는 강력한 팬덤이 있는 조 전 장관이 총선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출마는 하되 민주당과 무관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 연말까지 정국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 출마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 등이 혼재돼 있다. 국민의힘에선 ‘조나땡(조 전 장관이 선거에 나오면 땡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출마가 민주당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다만 여론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우려도 감지된다.
불출마를 택하는 게 조 전 장관 개인을 위한 길이라는 의견도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조 전 장관은 정치인보다 학자로 살기를 원한 사람”이라며 “총선 출마를 하면 (조 전 장관이) 더 다칠 수 있다. 집필 활동 등을 통해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명예 회복의 길”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진영을 위해 출마하지 않겠다’는 희생적 태도를 보이면 나중에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 명분이 될 수 있다. 길게 보고 후퇴해 있는 게 좋다고 본다”고 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명예가 훼손된 것이므로, 사실 어떻게 해서도 명예를 회복할 방법은 없다”며 “(조 전 장관은) 지금 ‘고독한 결단을 내린 비장한 나 자신’에 심취해 있는 상황 같다. 재판 결과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부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학자들은 그가 출마한다면 이는 한국 정치에 부적절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1심에서 실형이 나온 피고인이 ‘법의 심판이 아닌,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지적이다. 김형준 교수는 “조 전 장관은 법을 공부한 학자 아닌가. 출마를 통해 재판을 흔들려고 해선 안 된다. 법원의 최종적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자중하면서 성찰하는 게 상식적”이라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선거에서 당선된다고 해서 법원에서 유죄 받은 게 무죄가 되는 게 아니다. 개인 명예 회복을 위해 출마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 원로는 “정치에는 최소한의 금도가 있다”며 “(조 전 장관의 출마는) 나라를 또 다시 극단적 진영 대결의 늪에 빠뜨릴 것”이라고 했다.
조 전 장관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혁신위에 합류하기 한 달 전인 2015년 5월 트위터에 ‘새정치 혁신에 대한 입장’이라며 4가지 혁신안을 제시했는데, 그중 첫째는 ‘계파 불문 도덕적 법적 하자가 있는 자의 공천 배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