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주인공 마일즈가 전처와 마시고 싶었던 고급 와인 ‘샤토 슈발 블랑’을 혼자 플라스틱 컵에 담아 햄버거와 먹는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단번에 전신을 꿰뚫는 느낌도 있지만 어떤 느낌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온다. 아주 서서히.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일이 이해되기도 한다. 우연히 들은 말이나 만난 사람에게 열쇠를 얻기도 하는데, 열쇠인 줄도 모른 채로 있다가 어느 순간 딸깍 문이 열린달까. 그때의 기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샤또 슈발 블랑이 지금 그렇다. “그런 와인도 있군”에서 “느낌이 오네”가 되기까지 이십여 년이 걸렸다. ‘나와는 관계없음’에서 ‘어쩌면 상관있겠음’으로 좌표가 이동한 거다. 마셔보지는 못했다. 프랑스 보르도 8대 샤또 중의 하나이며, 누군가는 세계 최고라고 꼽기도 하는 이 와인, 그저 그런 빈티지도 100만원을 호가하는 이 와인을 마셔볼 일이 앞으로도 있을까 싶지만 지금 나는 슈발 블랑을 좀 알 것 같다. 나 좀 웃기다. 마셔본 적도 없으면서 알 것 같다니.

이 와인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한 건 씨네큐브에서 <사이드웨이>를 보고 나서다. 삼성 본관의 씨넥스와 정동의 스타식스, 혜화동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이런저런 영화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다. 거의 20년 전의 일. 그렇다. 슈발 블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슈발 블랑이 나오는 영화 <사이드웨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드웨이>도 슈발 블랑만큼이나 내게 매우 더디게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를 느끼기 위해서 이십 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 영화가 얼마나 마음에 와닿는지 이야기하면 듣기만 하면서.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라 속도 상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다시 <사이드웨이>를 보고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없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폴 지아마티가 연기하는 영화의 주인공 마일즈가 작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소설을 쓰지만 거듭 퇴짜를 맞는 마일즈… 에게 공감한다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나 보다. 당시의 나도 마일즈처럼 하기 싫은 일을 근근이 하면서 소설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때의 나는 소설을 한 자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되고 싶은 것은 소설가밖에 없었고, 그게 아니라면 뭐를 하며 살지 싶었고, 끝도 없이 막막해졌으므로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다.

영화를 다시 보니 소설가가 되길 바란다는 것 말고도 마일즈와 나는 닮은 점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까다롭다고 하는 자타를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에 카베르네에는 얼굴이 굳고 피노누아에는 얼굴이 환해지는 취향.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마일즈가 피노누아를 애호하는 것은 작가 취향의 반영인 동시에 키우기 힘들기로 유명한 품종인 피노누아에 대한 의인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일즈 정도의 와인 애호가는 아니면서 이 정도로 닮았다는 건 좀 그런가? 모셔둔 슈발 블랑도 없으면서? 그리고 슈발 블랑을 햄버거와 먹을 담대함도 내게는 없다.

그렇다. 최고의 순간에 마시기로 하고 아껴두었던 슈발 블랑 1961년산을 마일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마신다. 출판사에 투고한 소설을 거절당하고서. (한숨 한 번 쉬고.) 종이컵에 슈발 블랑을 따라서 마시는 장면은, 와인을 몰랐던 그때나 시간이 흐른 지금이나 충격이다. 이건 너무 자학이라서. 자학을 하려니 제일 ‘싼 거’(의 상징물인 햄버거)와 먹을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도 알지만 역시 마음이 아리다.

뭐라도 알게 된 지금이 더 아린데, 1961년은 슈발 블랑에게 운명적인 해 중 하나라 그렇다. 1947년은 전설로 남아 있는 슈발 블랑 최고의 빈티지고, 그다음 빈티지로 회자되는 게 1961년이다. 병입한 지 십 년은 넘어야 마실 수 있는 게 보르도 고급 와인이지만, 슈발 블랑은 미성숙할 때도 마실 수 있는데다 3~40년 후까지도 마실 수 있어 시음 적기가 가장 길게 이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보드로의 생테밀리옹 지역 와인인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 와인답게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의 블렌드로 만들어지는데, 마일즈는 메를로와 카베르네라면 끔찍해하는 사람이기에 왜 하필이면 슈발 블랑이었나 생각했었다. 인생에 대한 역설인가,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있나 의문이 남았다.

왜 슈발 블랑이었나? 애플TV에서 제작한 드라마 <신의 물방울>을 보다가 답을 얻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서 와인의 품종과 산지, 빈티지까지 모두 알아맞히는 게 주요 스토리인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레드 와인을 마시고서 화이트 와인 냄새가 난다며 집착한다. 천재적인 후각의 소유자인 그녀가 맡았다고 주장하는 냄새는 샐러리악. 나 같은 초심자가 알기로도 샐러리악 냄새는 레드 와인에서 나는 게 아니다. 양치류의 맛과 미라벨, 블루베리, 카카오, 담배, 분필 냄새가 또 난다고 했다. 이 와인이 바로 슈발 블랑이었다!

그제야 ‘슈발 블랑(Cheval Blanc)’이라는 이름이 들어 왔다. 그냥 고유 명사라고 생각했는데… ‘하얀 말’이라는 뜻을 거의 레드 와인만 생산하는 생테밀리옹의 샤또에서 쓰는 이유가 있었다. 답은 화이트 와인 느낌이 나는 레드 와인이라서. 이건 그렇다면 부르고뉴의 피노누아에 가까운 와인인 것이다! 강건하고 파워풀하고, 시간을 견디는 보르도 와인이면서 동시에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서정적인 우아함도 지닌 게 슈발 블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강철로 만든 무지개’ 같은 역설이 함께 있는 와인이 슈발 블랑이었다. 순식간에(알고 보면 20년이 걸렸지만) 이런 추론에 이른 나는 마일즈의 최애가 왜 슈발 블랑이었는지 너무 알겠어서 한숨이 나왔다.

파리에는 ‘슈발 블랑’이라는 호텔도 있다. 슈발 블랑 파리를 검색하면 ‘블랙핑크 지수가 파리에 갈 때마다 묵는 호텔’이 따라붙는데 이 또한 ‘샤또 슈발 블랑’과 연관이 있다. 루이비통 모엣 헤네시라는 뜻의 LVMH그룹이 샤또 슈발 블랑을 인수했고, ‘슈발 블랑’이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호텔을 열었고, 블랙핑크 지수는 디오르의 앰버서더인데, 디오르도 LVMH 그룹에 속해 있다.

사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이야기가 나는 왜 재미있는가.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면 할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이 말이다. 소설가로 살 수 있어 다행이다. <사이드웨이>도 다시 볼 수 있었고,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분들이 계셔서. 가끔은 백마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