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초여름, 정조(1776~1800)의 총애를 받으며 승정원의 고위급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별안간 2박 3일간 ‘근무지 이탈’을 감행한다. 그길로 도성을 빠져나와 고향이자 생가가 있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능내로 향한다. ‘마재 마을’ 생가 근처 소내(소천·苕川)에서 두 형제들과 어울려 물고기를 잡았다. 생가 부근 한강인 열수(洌水) 가운데 떠 있는 섬 ‘남자주’에 배를 대고, 어탕을 끓여 먹으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 건너에 있던 ‘천진암’으로 가 향긋한 산나물을 캐 맛보기도 하고, 형제들과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이며 계절을 실컷 즐기다 복귀한다. 이탈 사유에 대해 다산은 시문집을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저 소내에서 고기잡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노라.”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열수에서 고기잡이한 날들을 그리워했다. 생가 앞을 흐르는 열수는 유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산의 삶을 지탱해온 젖줄이자 희로애락이 녹아든 물길이었다. 열수를 따라가는 길은 다산의 발자취와 가장 빠르게 만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걷다 보면 시나브로 그의 업적과 가르침이 그 길 위에 펼쳐진다.
위민정신으로 실학을 완성한 대학자이자 개혁 사상가, 저술가이던 ‘조선의 멀티 플레이어’ 다산 정약용. ‘아무튼, 주말’은 다산의 본향(本鄕) 남양주시와 함께 우리 역사상 큰 스승이자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인문 기행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다산이 ‘열수’라 부른 한강이 그 출발점이다.
◇일탈을 부르는 초여름의 능내
과연 일탈을 부르는 풍경이다. 6월 중순에 접어든 열수, 지금은 팔당호라 부르는 조안면 능내리 일대는 그야말로 ‘봄꽃보다 녹음이 한 수 위’인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에 접어들었다.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고요하기만 한 초여름의 팔당호도 아름답지만, 다산이 바라봤을 쪽빛 한강은 지금보다 더욱 눈이 부셨을 게다. 유유히 흐르며 유리조각 흩뿌린 듯 반짝이는 윤슬로 채웠을 테니. 다산은 이 열수와 가까이 있는 고향을 자랑스러워했다. 1818년 해배(解配·귀양을 풀어줌)돼 고향에 다시 돌아온 뒤엔 아예 ‘열수’라는 호를 썼을 정도였다. 다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다산이오’의 저자이자 김형섭 남양주시 문화예술과 정약용팀장은 “열수는 다산이 풍운의 꿈을 꾸게 한 곳이자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해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산은 열수를 거쳐 유배를 가기도, 해배돼 돌아오기도 했다.
◇‘희작소계도’ 속 ‘남자주’와 ‘쌍부암’
다산이 자주 바라봤을 열수는 생가이자 생을 마감한 ‘여유당’ 일대였다. 능내리 마재 마을 중심부의 여유당은 ‘정약용 유적지’ 안에 자리한다. 유적지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986년 복원한 여유당과 다산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다산기념관’, 그와 그의 부인 홍혜완의 합장묘가 한데 모여 있다. 뒷동산에 자리한 묘소는 대홍수 당시에도 유실되지 않고 남아 지금까지 이어지는 소중한 유적이다. 생전에 다산은 열수를 그토록 좋아했지만, 아쉽게도 묘소에선 열수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다산생태공원’에 이 물길을 편히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
문학박사이자 얼마 전까지 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를 지낸 김형섭 정약용팀장은 “다산 선생의 방대한 업적에 비해 그 흔적은 많지 않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글 속에 이곳 풍경이 그림처럼 남아 있다”며 “다산문집에 실린 ‘소내사시사’나 ‘희작소계도’ 등에 언급된 곳들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따라가보는 것도 다산 발자취 기행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다산은 유배 당시 장기(포항)에서 송나라 문인 소동파의 ‘아미산도’를 떠올리며 향수를 달래려 소내 일대 풍경을 그렸다. 스스로 ‘거칠게나마, 장난삼아 그린 그림’이라 이름 붙인 ‘희작소계도’엔 시를 곁들였는데 고향집 일대의 ‘남자주’ ‘석호정’ ‘필탄’ ‘검단산’ ‘백병봉’ ‘수종사’ 등 다산이 즐겨 찾던 숨구멍이 여럿 등장한다.
‘향기로운 풀이 푸르른’이라 표현한 ‘남자주’는 양수리에 있는 ‘족자섬(족자도)’을 말한다. ‘2박 3일간의 승정원 이탈’ 때 형제들과 배 타고 들어가 어탕을 끓여 먹은 현장이다. “겸재 정선이 한강과 한양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남긴 화첩 ‘경교명승첩’ 속 ‘독백탄’ 아래쪽 섬이 ‘희작소계도’의 남자주”라는 게 김형섭 팀장의 설명. 현재 섬은 주변이 댐 완공 후 수몰되면서 윗부분만 조금 남아 있다. 팔당호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몽환적 풍경을 선사한다. 다만 지금은 상수원보호구역에 속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대신, 가마우지가 점령 중. 두물머리길을 따라 걸으며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희작소계도’에 남자주와 함께 나오는 쌍부암은 족자섬과 마주 보고 있다. ‘정약용 유적지’에선 걸어서 5~10분 거리다. ‘감나무 집’ 식당 뒤편 다산의 큰형 ‘정약현 묘’ 부근 절벽에 있는 두 바위가 쌍부암이다. 길이 닦여 있지 않아 오르는 길이 녹록지 않으나 20여 분 산길을 올라가면 절벽 부근쯤 아래로 열수가 펼쳐진다. 길 지나던 마을 주민은 “일반 여행객보다 ‘의지가 있는’ 답사객이 이따금 찾는다”고 했다.
◇‘두미협’ 지나 ‘미호’까지
다산생태공원 앞 물길은 양수리 ‘두물머리’와 와부읍 팔당댐, 한강과 연결된다. ‘두미협(斗尾峽)’ ‘도미협’이라 불리던 팔당댐 부근은 다산이 꼽은 고향 마을 12경 중 “겨울철 고기잡이 풍경이 아름답다” 했던 곳. 이뿐 아니라 이벽으로부터 처음 서학을 접했고 이후 다산의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준 역사적 장소다. 훗날 다산은 노론의 모함으로 천주교에 연루돼 긴 유배길에 오른다. 지금은 이런 역사성보다는 절경 덕분에 힐링을 위한 나들이,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다.
팔당을 곁에 두고 다산로를 거쳐 경강로를 달리다 보면 팔당역 뒤에 ‘남양주시립박물관’이 나온다. 조선시대 고전 미학의 백미로 꼽히던 ‘곡운구곡첩’을 미디어실감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특별기획전 ‘남양주 미학, 곡운구곡을 품다’가 열리는 중이다. 곡운 김수증부터 다산 정약용까지 남양주 학자들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산수가 실감콘텐츠로 펼쳐진다.
이어 가볼 만한 곳은 수석동에 있는 ‘석실서원 터’와 ‘미호’다. 병자호란 당시 충신 김상용·상헌 형제를 기리기 위해 1656년 창건한 석실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이자 진경문화를 구축한 역사성을 지닌 곳이라 들러볼 만하다. 다산은 이곳의 김매순과 교류하며 ‘아언각비’ ‘이담속찬’ 등을 저술했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주택가 안쪽 언덕에 석실서원 터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다. 허탈해하기엔 이르다. 몇 개의 계단을 걸어 ‘조말생 선생 묘’에 오르면 정선의 경교명승첩 속 또 하나의 작품인 ‘미호’ 속 실루엣이 눈앞에 펼쳐진다. 주택과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여 상전벽해를 실감하지만, 산수(山水)는 말이 없을 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근 피크닉 명소인 ‘남양주 한강 공원 삼패지구’ 공원 중앙엔 다산이 유배 시절 흑산도에서 큰형을 그리워하며 쓴 시 ‘가을날 약전 형님을 생각하며’ 시비가 기다린다.
◇‘상심낙사’ 수종사
운길산 수종사를 지나칠 수 없다. 차량 이용 시 ‘조안보건지소’를 통해 주차장까지 올라가는 길이 많이 알려져 있으나 등산객이나 도보 답사 여행객들에겐 ‘이덕형 별서 터’를 거치는 코스를 권한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신 이덕형은 다산의 학문적 대선배 뻘이다. 다산은 그의 후손인 실학자 이기양과 연을 맺었다. 이덕형의 별서였던 ‘대아당’은 사라지고 민가 앞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과 손수 심었다는은행나무(수령 400여 년) 두 그루가 남아 별서 터였음을 알린다. 뒤로 난 산길을 따라 30여 분 오르면 수종사에 닿는다.
수종사는 조선시대 도성을 드나들던 많은 시인 묵객이 찾던 명소였다. 역사적으로 수종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 중 한 명이 역시 다산이다. 어렸을 땐 책을 이고 지고 올라가 글공부를 했고, 진사시 합격 후 축하 잔치가 열린 곳도 수종사다. ‘마음으로 감상하는 즐거운 일’을 다산은 ‘상심낙사(賞心樂事)’라 했는데 눈 덮인 산과 배꽃으로 뒤덮인 수종사의 풍광을 보는 것도 그 즐거움 중 하나라 했다. 배꽃이 하얗게 물드는 계절을 지나 녹음에 파묻힌 경내를 조용히 한 바퀴 걷다 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농가월령가’ 탄생지, ‘사라담’ 달구경도
김형섭 팀장은 “여행지는 아니지만, ‘삼태기마을’은 다산이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 홍석모 등 19세기 학자와 교유했던 곳이자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농가의 행사와 풍속을 담아 지은 월령체 가사 ‘농가월령가’ 탄생 배경지이기도 하다. “다산은 백성의 어려움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해법을 찾아 고민하면서 실학을 완성해갔는데 이곳은 다산이 농업을 실험한 무대이기도 하다”고. 조안1리,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금살’이라 불리는 골짜기 부근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박수길(63)씨의 밭은 온통 연둣빛 들깻잎으로 덮여 있었다. 박씨는 “밭이 좋아 뭐든 잘된다”며 순박하게 웃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다시 능내리로 가는 길, ‘정약용 유적지 입구’ 버스 정거장에 서니 머리 위로 하얀 달이 마중 나왔다. 다산이 달 구경하기 좋다던 ‘사라담’이었다. 달빛보다 어둠을 물들이는 짙은 풀내음이 걸음을 붙잡았다.
[ ‘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부터 ‘하피첩’까지... 정약용의 편지 ]
다산의 편지 만나는 또 하나의 여행
‘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창작과비평)는 1979년 초판이 나온 이후 40여 년간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절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가족과 지인, 친우에게 보낸 서신들을 엮은 책을 읽다 보면 대학자이기 이전에 다산의 인간미가 느껴진다. ‘유배’라는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편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다산만의 유일하고도 절실한 방법이었다.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 남양주시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와 마주한 ‘실학박물관’의 상반기 특별 기획전 ‘동백꽃은 지고 봄은 오고-유배지에서 쓴 정약용의 시와 편지’(~9월 10일)를 눈여겨볼 일이다. ‘유배길에 오르다’ ‘유배지 강진과 고향 마재’ ‘홍혜완의 남편’ ‘아버지 정약용’ ‘그리운 형제’를 주제로 ‘열상산수도’ 등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부인 홍혜완의 치맛자락을 잘라 편지첩으로 만든 ‘하피첩’ 이야기, ‘마과회통’ ‘농가월령가’ 탄생의 계기가 된 아들들에게 쓴 편지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보물인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을 비롯해 ‘다산 상심낙사첩’ ‘매화병제도’ 등도 전시한다. 전시를 기획한 실학박물관 측은 “유배지에서 저서 500여 권을 탄생시킨 다산의 저술 활동의 원천은 가족 사랑이었다”며 “편지 이야기를 통해 가족애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팔당을 따라 난 ‘남양주 다산길’(4대강 자전거 종주길) 현 ‘봉주르 스퀘어’ 부근 휴식 쉼터(다산로 478-56)엔 ‘이근호의 손편지손정원’이 기다린다. 편지 여행을 이어가볼 만한 곳이다. 하피첩에서 영감을 얻어 손 편지를 테마로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편지라기보다 메모에 가깝지만 함께 전시한 고석용의 설치미술 작품, 팔당호를 감상하며 남이 쓴 글을 몰래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