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길(1921~1990) 이화여대 총장과 동생 김동길(1928~2022) 박사 남매는 서울 대신동 자택으로 지인을 초청하면 꼭 냉면을 대접했다. 꾸미가 없는 ‘누드 냉면’에 편육 한 접시나 녹두부침이 전부였지만, 권력가부터 이화여대 경비원까지 이른바 ‘옥길 면옥’에서 밥 먹은 걸 자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 총장이 별세하자 지인들은 국수틀을 뽑아 이화여대 국문과 59학번 장선용 집으로 가져갔다. 생전 김 총장도 “이거 받을 사람은 장선용밖에 없다” 했다. 예상대로 장선용은 손목이 나가도록 메밀가루을 반죽해 냉면을 뽑아댔다.
아들이 결혼하자 미국 사는 며느리를 위해 장씨는 편지마다 조리법을 적어 넣었다. 이걸 지인들이 좋다며 복사해 나눠 보면서 ‘매일 해 먹는 요리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후 이화여대 출판부가 1993년 정식 출간했다. 제목이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파란이자 선풍이었다. ‘시어머니=무서운 사람’이라는 도식을 깨고 다정한 말투로 며느리에게 음식 비법을 전수했다. 요리책이지만 사진이 없었고, 그럼에도 레시피가 정확해 30만부가 팔렸다. 이후로 ‘에게 주는 요리책’ 식의 제목 짓기가 유행했다. 53세 주부 장선용은 당시 거의 최초의 ‘집밥의 여왕’이었다.
그 후 30년, 이 책을 본 요즘 사람 반응은 이렇다. “결국 자기 아들 밥 해주라는 소리잖아.” “아들에게 주는 요리책은 왜 없어요?”
◇‘반가 음식’을 집으로 들여온 원조 ‘집밥의 여왕’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30분 거리 소도시 프리몬트(Fremont)로 장선용(83)씨를 만나러 갔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약속을 청하자 즉각 답이 왔다. ‘점심 밥때 맞춰 오라’는 주문이었다. “얼굴만 보면 뭐 해. 밥을 같이 먹어야지.” 식탁에 앉자 구절판과 돼지갈비 강정, 소고기 구이, 오이소박이와 배추김치가 나왔다. 후식은 “새벽에 쌀가루 갈아 후딱 쪘다”는 동부 계피를 얹은 메떡. 반가(班家) 음식을 내놓는 한정식 식당보다 만듦새가 더 야무졌다.
-모든 재료를 이렇게 곱게 채 쳐서 볶은 구절판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구절판 음식은 재료는 임의대로 하더라도, 오이 당근까지 곱게 채 썰어 볶아서 내야 해요. 요샌 구절판에도 생야채를 턱 내놓는 식당이 많더라고.”
-음식을 어머니께 배우셨나요?
“부모님(부친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와 사촌지간)이 신의주 분인데, 원래 이북 사람들이 먹는 데 열심이잖우. 어머니는 교육열이 남달랐는데도, 메주 뜨고 장 담그는 날, 김장 날은 학교에 보내질 않았어. 무엇보다 강인희 선생께 10년 배운 게 결정적이었어요.”
강인희(1919~2001) 선생은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의 형)의 종부 김정규 여사, 순정효황후의 올케 조면순 여사에게 반가 음식을 배웠다. 1978년 명지대 가정학과 교수에서 퇴임한 후 ‘한국의 맛 연구소’를 세워 반가 음식을 기록하고 보존한 인물이다.
◇“저는요, 정말로 남편 밥을 잘 먹이고 싶었어요”
-대가에게 배우셨네요.
“다른 음식은 책 보고 하겠는데, 떡이 안되더라고. 강 선생님 명성을 듣고 찾아갔지. 그분은 요리 학원 강사 같은 프로만 받고, 일반인은 받지 않는 분인데 나를 받아줬어. ‘저는 정말로 우리 남편 밥을 잘 먹이고 싶어요’ 했더니 기뻐하시더라고.”
-남편 밥을 뭘 그렇게까지....
“남편이 왕이면 내가 왕비 되잖아(웃음). 사람이 말이에요, 좋은 음식 먹어야 순한 사람이 돼요. 애들도 제대로 먹여야 제대로 크고.”
장선용씨는 남편 이영일(90)씨를 1964년에 만났다. 평양 근방 순천 출생인 이영일은 귀하게 컸다. 부친이 딸 일곱 끝에 얻은 아들을 위해 유치원을 세우고 서울서 교사까지 초빙했다. 중학 재학 시절 공산당 비난 유인물을 붙였다가 소년 수용소에 1년 갇힌 ‘반공 소년’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징집을 피해 숨어 있다가 1950년 겨울, 혈혈단신 월남해 해병대에 입대했다.
서울대 공대 졸업 후 석유공사에 다니던 청년 이영일을 장선용의 어머니가 먼저 점찍어 선을 보게 했다.
-젊어서 인기가 많으셨겠어요.
“아유, 말도 마. 내가 키는 작은 게 말대꾸를 꼬박꼬박 한다고 맨날 퇴짜 맞았어. 그 사람 처음 만나는 날, 명동 미도파백화점 지하 다방에 가서 앉으면서 내가 그랬어. ‘선 보러 오셨어요? 그럼 실컷 보세요’.” 이영일은 키 작고 눈이 반짝반짝한 여자를 보고 바로 좋아했다. 작은 키를 두고는 “트랜지스터는 작아도 소리만 잘 난다”고 한다.
1964년 결혼 후 남편은 호주로 유학을 다녀와 반도체 기업 페어차일드, 장비업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지사장을 거쳐 미국 본사에서 퇴직했다. 2003년 은퇴 후 두 아들 직장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아예 이주했다. 장선용 요리책이 한식을 넘어, 동남아식, 중식, 양식까지 메뉴가 너른 이유다.
장선용은 남편이 유학 간 사이 이화여대 학무처에 근무하면서 돈 모아 집을 사고, 틈틈이 최고 스승들에게 배웠다. 음식 배우고, 조각보와 한복은 정정완(정인보 선생 장녀) 선생에게 사사했다. 이렇게 최고들에게 배워 90년대 두 아들(65년, 66년생) 결혼 폐백은 집에서 해줬다. 미국서 손자 돌상을 차릴 때는 앵두나무 가지로 활도 만들었다.
“시댁만 절 받던 시대였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딸 키운 부모, 조부모까지 당연히 절 받아야지. 우리 집은 약혼식 대신 폐백에 양가 130분을 모셔서 서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을 받았던 며느리가 지금도 근처에 살며 ‘요리 선생 장선용’의 조교로 활동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을 말하던 그는 ‘돌잔치’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했다. “원래 돌잔치 상은 과일 몇 개, 떡 한 접시 이렇게 소박하게 차리는 거에요. 너무 화려하면 귀신이 시샘한다고. 요즘은 돌상에 굽 달린 접시를 많이 쓰던데, 돌상에는 절대, 절대로 그런 거 쓰는 게 아니에요.”
◇요즘 세대는 펄쩍 뛸 제목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사람들 불러 음식 퍼먹이시기로 유명합니다.
“말로만 하는 건 별로야. 밥 같이 먹는 게 제일이지. 음식 끝에 정이 나잖아요. 있잖아, 사람들이 다 김옥길 총장님이 자기를 제일로 예뻐하시는 줄 알았어. 밥을 잘 먹여 주니까. 하하.”
-선생님 책 제목을 듣고 요즘 젊은 세대 반응이 싸늘한 건 아시죠?
“아유, 못됐어(웃음). 직장 다니다가 결혼하면 아무것도 모르잖아. 기왕 먹을 거 제대로 해 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쓴 거야.”
-아들에게도 요리 가르치셨어요?
“안 가르쳤는데, 저희가 잘하더라고. 와이프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음식은 안 가르쳤지만, 설거지는 정확히 가르쳤다. “여자들이 왜 명절마다 뿔따구가 나는지 알아요? 여자들만 일 시키고, 저희은 놀아서 그러는 거잖아. 분담해야 해.”
-요즘엔 ‘분담도 싫다. 명절에는 누워 있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구, 죽으면 평생 누워 있는데 뭘 누워 있어.”
-그래도 좀 적당히 하는 게 편하잖아요.
“적당히 해서 되는 게 세상에 어딨어요. 나는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아.”
‘적당히’란 표현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도 장선용 요리책의 특징이었다. 정확한 계량, 현지화한 계량이 특징. 미국에서 살던 자식 부부를 위해 ‘코스트코 오이 두 봉지에 무채 한 컵 반’ 식으로 썼다. 그가 미국서 ‘한식 쿠킹 클래스’를 하면서 인원을 적게 받는 이유는 수강생이 ‘정확한 계량’을 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다.
-쿠킹 클래스에 온 수강생이 배우고, 먹고, 음식을 엄청 싸가는 식이라면서요. 남는 게 있으세요?
“한 회에 80달러 받았는데, 나는 나대로 많이 배워. 며느리 친구들 얘기 들으면서 ‘우리 며느리 마음이 저렇구나’ 미리 알고 조심해요. 코로나 기간에 쉬었는데, 너댓 명 정도로 다시 시작할까 해요.”
장선용은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제목이 배척받는 시대를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고집은 전업주부의 자존심이 팔할 이상일 것이다. ‘가정 최고경영자(CEO)’라는 자존심.
저녁 식사를 마치면 부부는 매일 늘 같은 대화를 한다.
“아, 잘 먹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고마워요.”
“잘 잡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