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비비테

결심과 실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결심과 실행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하는 일도 있다. 나에게는 수영이 그런 일이었다. 지난해 여름 소셜미디어에서 집 근처 복합체육센터 수영장 사진을 보자마자 수영을 배울 결심이 섰다. 하지만 회원 등록을 하기까지는 1년 가까이 걸렸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매달 중순에 치열한 수강 신청이 이루어지는 줄도 모르고, 월말이 돼서야 이미 마감된 접수창을 허망하게 바라보기만을 몇 달. 수영복을 입으려면 살부터 좀 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고민하기를 또 몇 달. 여러 가지로 바쁜 일정 탓에 수영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어두기도 몇 달.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다시 여름이 왔다. 새벽 수영을 다니더니 얼굴이 좋아진 친구 때문인지 더워진 날씨 탓인지 다시 수영에 대한 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래도 수요가 많던 수영 강습은 어느새 유명 연예인의 콘서트만큼이나 인기가 많아졌다. 수강 신청 기간은 한참 지났고, 이미 수업이 시작된 후니까 내 자리가 있을 리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강 신청란에 들어갔다. 그런데, 있다! 딱 한 자리. 누군가 조금 전에 취소한 게 분명했다. 허겁지겁 신청 버튼을 누르고, 결제까지 마치고 보니 당장 몇 시간 뒤부터 수업이었다. 몸과 마음은 준비가 됐는데, 수영은 그것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다. 수영복, 수경, 수모까지. 단 한 번도 내 돈 주고 산 적 없는, 어디에서 파는지도 잘 모르는 수영 3종 세트가 필요했다.

처음 사보는 거라 감이 오질 않아서 수영복 매장을 찾았다. 여름이 오기는 왔는지, 사람이 제법 있었다. 매장 앞에 걸린 작고 예쁜 비키니와 프릴이 달린 원피스가 시선을 끌었다. 세상의 모든 색깔이 그곳에 다 있었다. 문득 겁이 났다. 내가 입을 수 있는 수영복은 이곳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는 폼이 영 초보 같았는지, 점원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매장 안쪽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하셨다.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괜찮으실 거예요. 처음 하시는 분들이 보통 이런 거 입으세요.”

수영복 몇 벌을 척척 꺼내 드는 그녀의 손짓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영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얘들은 2XL까지 나옵니다.”

그제서야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눈앞에 걸린 수영복을 살폈다. 매장 앞에 걸린 수영복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프로의 향기가 났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봤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몸에 딱 붙는 민소매에 깊게 파인 등, 허벅지 위까지만 가려지는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왠지 어색했다. 검은 수영복에 그려진 푸른 문양이 꼭 돌고래가 지나간 자리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살짝 문 열어보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

만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몸을 보여주는 건 어쩐지 부끄럽지 않았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괜히 기분도 좋아졌다. 전문가에게 인정받은 느낌. 믿음이 갔다.

“수경도 사실 거죠? 김서림 방지 코팅 돼 있는 걸로 하세요. 그리고 미러 수경이 요즘 잘 나가요. 다른 사람이랑 눈 마주치면 민망하잖아요.”

수영을 배우러 가서 누군가와 눈 마주칠 일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였다. 그렇게 매장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경과 수모, 실리콘 브라, 수영 가방까지 구매했다. 뭔가에 홀린 듯이, 나의 모든 선택은 그녀의 조언대로 이루어졌다.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매장 밖으로 나오는데, 비슷한 모습을 한 과거들이 떠올랐다. 데자뷔인가. 복싱을 하겠다고 석 달 치를 한 번에 등록하고, 글러브까지 샀지만 다섯번 나간 후부터 그 근처를 피해 다녔던 기억. PT 선생님의 추천으로 샀지만, 오래된 가구처럼 늘 같은 자리에 방치된 폼롤러와 요가매트. 그 외에도, 욕심내서 사 놓고 아직도 읽지 않은 수십권의 책, 몸에 좋다고 해서 잔뜩 샀지만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양배추즙과 호박차까지. 충동적 소비는 늘 끝이 좋지 않았다. 수영 강습은 4만원밖에 안 하는데, 수영을 위한 아이템을 사는 데 20만원이 들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해낼 거다. 수영만큼은 오래오래 계속할 수 있는 취미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