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 작가 레마르크가 1929년 발간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가 맞닿은 서부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의 전쟁 경험을 다룹니다. 작가 자신의 제1차 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인간의 무력함 등을 통해 전쟁의 비참한 본성을 솔직하고 현실적인 묘사와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소설로서 전쟁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습니다.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조하며 입대를 선동하는 선생님의 영향으로 군에 자원입대한 파울 보이머 등 스무 살이 채 안 된 학도병들이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적군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살상한 적군의 시체 앞에서 고뇌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하지만 차츰 살상은 일상의 일이 됩니다. 독가스로 폐가 타버려 검은 가루를 토해내거나, 포탄 파편으로 인해 구멍 뚫린 배를 붙잡고 달려가거나, 적군을 향해 진격하던 중 두개골에 직격탄을 맞아 머리가 없는 채로 몇 걸음을 내딛다가 구덩이에 빠지는, 비참한 전장의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잔혹해지고 그럴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습니다.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전쟁 속에서 함께 참전한 학우들은 차례로 다 전사하고 종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마지막 남은 파울마저 전사합니다.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를 띄웁니다. 전투와 죽음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 보고는 사람들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전투와 죽음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독일어 소설 제목을 직역하면 ‘서쪽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변화가 없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노멀(normal)한 상태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이 연속되는 비정상적 상황이 노멀한 상태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 제목은 냉소를 담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또한, 일본에서 이를 ‘서부전선 이상 없다(西部戦線異状なし)’라고 번역한 것은 독일어 제목과 같은 취지로 미국에서 번역한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서부전선, 모든 것이 고요하다)’보다 적절해 보입니다.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한 전쟁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전 직후 세계는 우크라이나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붕괴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미국 등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강력한 항전 의지를 갖고 선전하고 있고, 반면 러시아는 고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서방세계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계속되는 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로서는 명분 없고 승산 없는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옳은 길이지만, 장기전으로 가더라도 중국·이란 등 미국 견제 세력과 연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도 2014년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 사이에 전쟁은 상당 기간 교착 상태로 들어가 전쟁에 내몰린 군인들과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각종 기반 시설 파괴로 인한 피해가 날로 커갈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참호전이 진행된 서부전선은 전쟁 내내 고작 몇백 미터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서로 얻은 것도 없이 일상적으로 진행된 그 참혹한 전쟁터, 그곳에서만 300만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극적인지를 함축해 보여줍니다. 이대로 가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끝내려는 국제 사회의 노력도 부족합니다. 마치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헛된 보고만 쌓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서부전선 이상 있음”을 되뇌어야 할 때입니다.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야 합니다.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를 제외한 점령지에서 러시아가 철수하는 방안을 중심으로 타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