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내내 한여름인 싱가포르엔 이런 농담이 있다. 이 나라도 나름 두 계절이 있다고. “바깥은 여름, 안은 겨울.”
기름 한 톨 안 나는 섬나라지만 어딜 가나 빵빵한 에어컨의 축복이 내리는 곳, 연중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열대 기후에서도 털모자와 패딩을 파는 우쭐대는 나라. 호주머니 사정 넉넉한 이들의 명품 쇼핑지라고만 생각했던 그곳의,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바깥’이 궁금했다.
날이 더워지면 마음이 달뜬다. 한여름엔 방학, 아니면 휴가가 있으니까. 한국에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오기 전, 싱가포르에서 여름방학의 설렘을 미리 맛보고 왔다. 메트로폴리탄의 다이내믹과 대자연의 웅장함이, 원시와 문명이, 수평선과 밀림이,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뒤섞이는 이곳에서 사상 첫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건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골목 벽화 따라 세계 여행
말레이 반도 끝자락 외딴섬이던 싱가포르는 19세기 초 영국이 자유 무역항을 열면서 상업의 중심지가 됐다. 유럽과 주변국에서 다양한 민족이 밀려 들어오자 당시 영국 정부는 각 민족이 거주할 땅을 나눠줬고, 이주민과 상인들은 저마다 정착한 동네에서 고유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왔다. 지금 ‘차이나 타운’과 ‘아랍 스트리트’ ‘리틀 인디아’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동네들이다. 600만명의 싱가포르 인구는 중국계가 76%, 말레이계가 15%, 인도계가 7%다.
거리에 침을 뱉거나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관광객에게도 가차 없이 벌금을 매기는 깨끗하고 엄격한 파인 시티(Fine City). 나무 한 그루도 계획적으로 심는 이 나라에서 세 동네는 일탈적인 ‘거리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곳들이다. 벽화를 따라 동네를 걸어봤다. 쾌적한 에어컨 바람에서 잠시 벗어나 싱가포르를 다르게 즐길 수 있다.
차이나타운의 숍하우스(1층은 상점이나 식당이고 2·3층은 가정집인 싱가포르 고유 건축 양식)는 붉은 등롱을 달았다. 웅장한 불교 사원 ‘불아사’ 뒤편의 한갓진 골목에는 중국 하이난과 광둥 사람들의 이주 초기 일상을 담은 그림이 담벼락을 수놓고 있다. 고향으로 부칠 편지를 쓰는 남자, 붉은 나막신을 신고 커다란 웍에서 볶음 요리를 하는 주부의 모습이 정겹다. 차이나타운에서 자란 샐러리맨 출신 화가 입유총(54)이 어렸을 적 듣고 본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 입유총의 벽화를 따라 여행하는 코스도 생겼다고 한다.
버스로 20분. 술탄 모스크(무슬림 예배당)에 가까운 정류소에 내리자 히잡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몰려 나왔다. 황금색 모스크 돔을 향해 걸으면서 ‘딴 세상 같다’는 생각을 할 때쯤 양쪽으로 숍하우스가 이어진 골목이 나왔다. 아랍 스트리트.
요즘 떠오르는 아랍 스트리트의 포토 스팟은 숍하우스들 뒤에 숨어 있는 골목길이다. 원래는 상점 쓰레기통으로 지저분했던 곳이 개성 넘치는 벽화로 채워지면서 관광객들이 찾는 포토 스팟이 됐다. 차이나타운 벽화가 그림책 같다면 이곳은 형태를 뒤튼 그래피티에 가깝다. 싱가포르에서 제일 힙한 ‘하지 레인’이 바로 옆 골목이다. 종로 익선동처럼 비좁은 골목길에 액세서리를 파는 편집숍부터 손님이 줄 서는 카페와 바까지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왕 더운 김에 뜨거워 보자. 젊은이들은 낮부터 불콰하게 취했다.
색의 향연은 15분 정도 떨어진 ‘리틀 인디아’로 이어진다. 초입부터 화려한 거리 장식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색색의 생화와 공예품, 천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다 보니 눈이 때꾼해질 정도. 자스민 향이 흐르는 거리를 걷다 보면 리틀 인디아의 인물 벽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타국으로 이주해 온 인도 근로자들에게 바치는 의미로 그려진 ‘Working Class Hero(노동계급의 영웅)’ 벽화가 대표적이다. 싱가포르 내 인도계는 대개 영국 식민 시대에 저임금 근로자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 리틀 인디아의 벽화에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을 향한 경의가 담겨 있다.
◇촉촉한 강바람에 야경을 안주 삼아
마천루와 강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야경이 보장돼 있다는 뜻. 싱가포르강 하류의 버려진 항구였던 클락키(Clark Quay)와 보트키(Boat Quay)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인 개발이 이뤄지면서 밤 문화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향신료·식료품을 보관하던 대형 창고들을 깨끗하게 복원하고 퍼걸러(pergola·그늘막)를 얹었다. 강변으로 식당과 바, 클럽들이 들어섰다. 낮의 클락키가 여유로운 카페 거리라면, 밤에는 화려한 조명과 음악의 열기가 찬다.
클락키 끝에서 모퉁이만 돌면 강변을 따라 노천 식당이 즐비한 ‘보트키’가 나온다. 클락키와 비슷하지만 덜 시끄럽다. 제일 한가한 인도 음식점에 들어가 강변 자리를 차지하고 맥주 한 병을 시켰다. 한국에서라면 덥다며 에어컨을 찾아 들어갔을 법한 녹녹한 강바람도, 낭만적인 야경과 함께하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클락키나 보트키에서 리버 크루즈를 타면 40분간 강변부터 마리나 베이를 한 바퀴 돌며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 빌딩의 도시 야경을 볼 수 있다. 성인 기준 25싱가포르달러(약 2만4000원).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가든스 바이 더 베이’도 밤이 압권이다. 25만 종의 희귀 식물을 볼 수 있는 인공 식물원. 특히 인공 나무 18개로 꾸며진 수직 정원, ‘수퍼트리 그로브’는 마치 영화 ‘아바타’ 속 숲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초현실적 느낌을 준다. 바오바브 나무를 형상화한 인공 나무는 높이가 25~50m, 건물로 치면 9~16층 정도. 해가 지면 색색 조명과 우아한 음악이 어우러진 황홀하고 압도적인 야경을 경험할 수 있다.
◇도시 속 정원, 정원 속 도시
종일 걷고 야경까지 흠뻑 즐기고 난 다음 날, 아침 해 뜨기 전 요가 매트를 들고 ‘보타닉 가든’으로 향했다. 오차드 로드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보타닉 가든은 82㏊(헥타르)의 광활한 열대 식물원으로 60만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곳이다. 그 역사만 164년, 2015년 싱가포르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조깅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입구에서 15분 정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백조 호수에 다다랐다.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인 고요한 호수를 백조가 한가로이 노닌다.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너른 잔디밭 한켠, 태극권을 하는 무리 옆으로 요가 매트를 폈다. 마시는 숨에 싱그러운 풀향이 들어왔다.
다 돌아보려면 한나절도 모자란 열대우림을 뒤로하고 아침을 먹으러 찾은 곳은 104년 전통의 현지 식당 ‘킬리니 코피티암’. 킬리니 로드에 있는 본점 말고도 싱가포르 곳곳에 지점이 있다. 연유가 들어간 싱가포르 현지식 커피 ‘코피(Kopi)’ 한 모금에, 카야잼(코코넛 밀크와 열대 허브 판단을 넣어 만든 잼)과 버터가 발린 토스트를 반숙 달걀에 찍어 크게 한입. 힐링 요가를 끝내고 맛보는 속세의 맛은 달콤했다.
도심 더 가까이서 초록을 느끼고 싶다면 포트 캐닝 공원이 대안이다. 금융업무지구나 호텔과 대형 쇼핑몰이 늘어선 오차드 로드에서도 걸어서 갈 수 있다. 중세 시대 말레이인 왕족이 싱가포르를 다스리던 장소이기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요새이자 일본군에 항복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이 공원 안에 있는 ‘트리 터널’이 사진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트리 터널은 지하에서 공원 입구로 들어가는 나선형 돌계단. 계단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찍으면 위가 동그랗게 뚫려 있어 나무와 하늘이 천장이 되어준다. 비가 내리는데도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섰다.
◇출렁다리 건너면,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오차드 로드에서 남쪽으로 20분만 차를 몰면 싱가포르 본섬에 딸린 또 다른 작은 섬, 센토사가 나온다. 복합 쇼핑센터인 비보시티에서 모노레일이나 케이블카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수상 레저 등 액티비티가 가득해 섬 자체가 테마파크. 싱가포르에서 바다를 즐기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보드라운 백사에 주황색 빛이 덧씌워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해변을 걸었다. 센토사는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라는 뜻. 섬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팔라완 해변에 닿으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올 것 같은 출렁다리가 보였다. 건너가도 괜찮을까, 밧줄을 한번 흔들어보고 잠깐 모험하는 기분을 만끽하며 걸음을 뗐다.
한 사람씩만 다닐 수 있는 좁은 폭의 출렁다리를 아슬아슬 건너면, 아시아 대륙 최남단 전망대(The Southernmost point of Continental Asia)가 나온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광활한 태평양이 펼쳐진다. 바다 위 대형 화물선들이 드문드문 떠 있어, 기대했던 것보다 눈맛이 장쾌하진 않다며 돌아서려는데, 옆에서 어느 노부부가 어둑어둑해지는 수평선을 말없이 가만 바라다본다. 반대로 돌아 바라본 팔라완 해변도 무척 아름다웠다. 센토사섬 안을 다니는 버스와 모노레일은 모두 무료다.
싱가포르의 별명은 ‘작고 빨간 점(Little red dot)’이다. 과거 어느 나라 대통령이 ‘지도에 찍힌 작은 점’에 불과하다며 무시하는 뜻으로 발언한 데서 비롯된 이 말은, 지금은 작은 국토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국으로 성장한 싱가포르의 자부심을 담은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봄의 싱가포르는 초록빛의 작은 쉼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