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님,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는데 훈련 그대로 진행하나요?”
지난 10일 토요일 오후 4시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떴다. 그러잖아도 묻고 싶던 말이다.
“그럼요. 너무 많이 오면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코치의 대답. 그 아래로 호쾌한 말풍선이 줄줄이 달린다. “우중 풋살 환상이에요!” “웰컴 투 워터 파크.”
오후 7시 반, 비구름 대신 분홍빛 노을이 진 서울 동대문구의 대형 마트 옥상에 도착했다. 빳빳한 인조 잔디가 깔린 풋살장 앞을 기웃거리는 동안 단체 채팅방 ‘그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신발주머니에서 풋살화를 꺼내 끈을 동여매고, 긴 머리는 한 번 더 당겨 묶고 풋살장으로 입장.
요즘 풋살하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 풋살은 FIFA(국제축구연맹)가 공인한 실내 축구 종목. 대한축구협회에 등록한 여자 동호인 선수는 2017년 말 2312명(97팀)에서 작년 말 5010명(173팀)으로 늘었다. 협회는 선수로 등록하지 않은 인원이 수십 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풋살은 빌딩 옥상이나 지하에서도 할 수 있는 도심 스포츠라 축구보다 진입 문턱이 낮다.
‘공 차고 싶다’는 여자들이 많아지면서 여성 전용 풋살 플랫폼도 생겨나고 있다. 수도권에서 여자들로만 지역 풋살팀을 꾸려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풋스타’의 황경준(27) 대표는 “2020년 8월 처음 서비스를 열어 15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입자가 3000여 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아무튼, 주말’이 풋스타 서울 성동팀 훈련에 함께했다. 밤까지 이어진다고 예보된 비가 일찍 그친 덕분에 우중 풋살은 못 했지만, 2시간 훈련 동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공만 보고 냅다 뛰다 선제골 허용… 진땀이 뻘뻘
풋살장 가운데 둥글게 모여 몸풀기를 하고 스텝 훈련을 시작했다. 두 진영을 나누는 하프 라인이나 네 귀퉁이의 코너 아크 등 생긴 모양은 축구장과 비슷하지만, 면적이 7분의 1 정도(길이 40m·너비 20m)로 작다. 공간이 좁은 만큼 방향 전환이 훨씬 잦고 빠르기 때문에 민첩한 발 동작이 필수다.
이날 메인 훈련은 ‘등지기’. 한쪽 발바닥으로 공을 잡아둔 채 양팔을 뒤로 젖혀 공을 뺏으려는 상대를 가두는 자세를 배웠다. 그 상태로 공을 앞으로 몰고 가는 드리블, 공 방향을 순식간에 틀어 압박을 벗어나는 훈련이 이어졌다. “처음인데 꽤 자세가 나온다”는 칭찬에 으쓱했다.
훈련은 끝, 연습 경기가 시작됐다. 다른 색깔 조끼를 나눠 입고 나니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긴장감이 맴돌았다. 5명이 한 팀이 되는 풋살의 기본적인 포메이션은 다이아몬드 대형. ‘골레이로’가 지키는 골문 앞으로 최후방 수비수 ‘픽소’, 좌우 측면에서 공수 모두에 가담하는 ‘아라’, 최전방 공격수 ‘피보’가 1-2-1 대형으로 선다.
첫 포지션으로 오른쪽 아라를 맡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 ‘보는 축구’에 입문한 지 25년. 기본은 안다고 생각했건만 실전은 만만치 않았다. 공이 발에 착 붙은 것처럼 능숙한 팀원의 발놀림을 따라 하고 싶었지만, 이리저리 튀는 공을 따라 방향을 바꾸려니 제 발에 걸려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의욕만 앞서 15분을 내리 공 따라 전력 질주를 하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이 찼다.
“공만 보지 말고, 상대를 잘 보다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해 봐요.”
잠시 쉬는 시간. 풋살 2년 차 선배님이 다가와 조언을 해줬다. 중계 화면 속 공만 쫓던 시선을 버리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조언을 새긴 덕인지 후반전 들어 처음 제대로 공을 잡고 골대 앞으로 몰고 갔다. 배운 대로 등지기를 구사하고 힘껏 공을 찼는데 웬걸, 공이 골문 앞에 힘없이 떨어져 또르르 굴러가는 게 아닌가. 일반 축구공보다 지름이 1.5㎝ 정도 작은 풋살공은 더 단단하고 반발력이 작아서 덜 뻗어 나간다. 더 힘껏 차야 한다.
“괜찮아요! 빨리 (수비 진영으로) 내려와!” 초짜의 잇단 헛발질에도 동료들의 지도와 격려가 아낌없이 쏟아진다. 주눅 들 겨를도 없이 다시 달렸다.
후반전 중간에는 골레이로를 자청했다. 거대한 축구 골대와 달리 팔을 쭉 뻗으면 삼면에 손이 닿는 꼬마 골대이니, 넣는 것보다는 막는 게 쉬울 것 같았다. 오산이었다.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왼쪽 골대 모서리를 노린 날카로운 상대 슛이 골망을 흔들었다. 땀 식히려는 심산이었는데, 진땀이 더 뻘뻘.
◇같이 골 만드는 맛에, 오늘도 행복 풋살
수영, 볼링, 승마 등을 섭렵한 박화영(25)씨는 새로운 운동을 배워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풋살을 시작했다. 서진(40)씨는 1년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로 누워만 지내다 살이 찌고 무기력해지던 참에, SBS 축구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고 인터넷에 ‘여자 축구’를 검색했다.
입문한 계기는 저마다 달랐지만 풋살에 빠져든 이유는 다들 비슷했다. 힘껏 ‘뻥’ 차면 공과 함께 날아가는 스트레스, 그리고 팀워크. 조이현(38)씨는 “승패도 중요하지만 ‘저 팀 정말 발이 잘 맞는다’란 말을 들을 때 희열을 느낀다”며 “내가 준 패스가 골로 연결됐을 때, 내가 넣은 골이 팀원들 사기를 올릴 때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지선(31)씨는 “성인이 되고 나서 팀워크를 발휘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풋살장에선 골이라는 목표 하나로 여럿이 하나가 된다”며 “공간을 발견하고 패스를 주고받으며 골을 만들어낼 때면 최상의 하모니를 만들어냈다는 짜릿함이 든다”고 했다. 이날 연습 경기에서도 코너킥 상황에서 연습한 전술이 먹히거나 서로 사인이 통할 때마다 마트 옥상이 떠나가라 “나이스!”가 울려 퍼졌다.
신인주(28)씨는 “원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도 팀을 위해 한 발 더 뛰는 팀원들을 보니 없던 승부욕도 생기더라”며 “최근에 나간 대회에서 우승을 확정짓던 순간, 종료 휘슬 소리와 동시에 팀원들과 눈을 마주쳤을 때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풋살 예찬의 끝에는 꼭 이 말이 붙었다. “이 좋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예쁘기보다 멋진 운동, 트렌드가 되다
인스타그램에 ‘풋살’이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해 나오는 게시물 53만여 건 중 절반은 여성들 사진이다. 레깅스나 복근 사진 대신 ‘파이팅’ 포즈를 취한 2열 횡대 단체 사진이 더 많다.
전국 12곳 점포 옥상을 개조해 풋살파크를 운영하는 홈플러스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여성이 풋살장을 예약한 건수는 작년 동월 대비 98%, 재작년보다는 390% 증가했다. 풋살하는 여자들이 많아지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여자 대학 축구대회이던 K리그 퀸컵(K-Win Cup)을 지난해부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여자 풋살 대회로 개편했다.
기업 사내 동호회에서도 풋살이 유행이다. 지난 10일 서울 강남 중앙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 7개 기업 여자 풋살팀 중 최강자를 가리는 승부가 열렸다. 작년 7월 카카오와 NC소프트의 친선전으로 시작된, 이른바 ‘판교 리그’. 이후 네이버·포스코·구글코리아·SK브로드밴드 등 인근 기업 팀이 하나둘씩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날 우승은 2승 3무를 거둔 카카오가 차지했다고 한다.
카카오 공동체 여자 풋살팀 주장 이본씨는 “혼자만 잘하면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성장 과정을 팀이 함께 경험하는 게 정말 재밌다”며 “업무에도 좋은 영향이 있어 회사 내 많은 분들이 경험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 여자 풋살팀 주장 성유현씨는 “다양한 직무와 나이대 사원들이 풋살로 모이면서, 다른 직무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고 했다.
부딪쳐 넘어지고, 발에 차이고. 풋살은 부상 위험이 도사리는 과격한 운동이다. 다치는 게 겁나지 않냐고 물었다. 서진씨는 “발목이나 허벅지 인대 부상은 예사”라며 “디스크 수술 받은 부위가 신경 쓰여 코어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영(36)씨는 “30대 후반인데 다쳐서 풋살을 못 하게 될까 봐 그게 더 겁난다”며 “몸싸움에 안 밀리려고 웨이트트레이닝도 시작했다”고 했다. 이 여자들, 공놀이에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