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미 페이지 같은 기타리스트가 되겠어!”

열세 살 이적이 일기장에 적었다. 대학가요제에 기타리스트로 출전한 사촌형이 부러웠다. 수련회에서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자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관심을 건넸다. ‘음악만이 살길이구나.’ 고2 올라갈 무렵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서울 반포동 스페이스 21에서 만난 이적은 실물이 훨씬 멋졌다. “어릴 때부터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겠다”고 하니 “고등학교 때 날 봤으면 실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에서도 유머와 학식을 뽐낸 그는 이 시대를 노래하는 시인이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저는 음악을 해야 해요. 그런데 전 세계 제 또래 뮤지션들은 지금 국·영·수를 붙잡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다. 그런데 대학은 갔으면 좋겠구나!”

1995년 데뷔해 숱한 히트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 서울대 출신 엘리트. 1세대 여성학자로 유명한 어머니 박혜란(요즘에는 ‘이적 엄마’로 불린다)과 잘나가는 형제들. 발레를 전공한 부인과 두 딸, 최근 인스타그램 글귀를 묶어낸 ‘이적의 단어들’까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다 가진 남자. 그는 ‘결핍’이라는 단어를 알까?

책에서 이적은 ‘성공’을 이렇게 정의했다. 성공: 싫은 사람과는 같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에서 만난 그에게 물었다. “이적씨는 성공하셨나요?” “어느 정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인생 곡은 아직 못 만들었어요.”

◇가수: 콘서트 할 때 가장 행복해

-’달팽이’ 등 제가 아는 인생 곡은 수두룩한데요.

“제가 죽었을 때 ‘이 사람은 이 노래를 쓴 사람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는 곡이라야 해요. 제가 빌보드에 오르겠어요? 그래미를 받겠어요?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은 걸 쓴 거 같은데’라는 만족감이 드는 곡을 쓰고 싶어요.”

-어릴 적 기타리스트를 꿈꿨다고요.

“그런데 기타리스트로 성공할 만한 손재주는 없었어요. 악기 연주자가 될 실력이 안 돼요. 운동신경처럼 타고나야 하거든요.”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심각하게 듣진 않으셨어요. ‘가수는 아무나 되냐’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부모님은 대학 때 연극 하면서 만난 사이라 한량 기가 있으세요. ‘알았는데 대학은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랬는데 서울대를 갔네요.

“매일 보고, 존경하지 않는 형이 서울대를 가서(웃음). ‘서울대 아무나 가네?’ 그러면서 고3 때 공부를 좀 했죠.”

-엄친아의 대표 격이라 질투하는 사람 많았겠는데요?

“고등학교 때 저를 못 보셨잖아요. 질투할 만큼 제가 잘생기고 다재다능하지 않았어요. 운동도 못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노래 만들고 부르는 거 좋아하는 애. 성적도 고 1 때는 반에서 6~7등 정도. 고3 때 확 올랐지만. 가장 인상적인 친구는 R.ef 이성욱이었어요. 모두가 ‘잘생겼다. 나중에 뭘 해도 난리 나겠다’ 했죠.”

-대학시절 가장 좋아한 가수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요. 술자리에서 노래하곤 했죠. 전 시나위 때부터 서태지 팬이었거든요. 굉장히 탄탄하고 블루지한 댄스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나와서 좋았어요.”

-어떻게 데뷔하게 됐나요?

“1994년 A-Teen이라는 밴드를 한 적이 있는데, 프로듀서가 ‘들국화’ 최성원 형이었어요. 형은 제 영웅이었기에 패닉 1집을 데모로 만들어 찾아뵀죠. 듣고 박장대소하더니 제 첫 제작자를 맡아주셨어요.”

-예명 ‘이적’을 ‘이적단체’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것을 환기시킨다는 건 알았죠. 내가 하면 이적 행위고, 발표하면 이적물이고, 팀을 결성하면 이적 단체냐. 풍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예명을 지은 건 본명(이동준)을 가진 배우분이 계셔서예요. 당시는 한 글자로 짓는 게 유행이었고, 센 걸 하고 싶어서 피리 적(笛)을 썼죠.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패닉’을 결성하자, 한 분이 ‘다 알고 지었지?’ 하는 거예요. 이 단어는 제우스의 아들인 판신에서 유래했는데, ‘시링크스’라는 피리를 들고 다녔대요. ‘너 그래서 썼지?’라는데 마치 알고 한 듯 가만히 있었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곡이라면.

“단기 저작권으로는 임영웅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행이다’ 같은 곡들도 결혼식마다 불려서 저작권료가 꾸준히 들어오고요. ‘왼손잡이’는 교과서에 실렸고, ‘걱정 말아요 그대’는 음원 차트에서 제일 성공한 노래고.”

-’왼손잡이’ 같은 곡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그때 미국 동성애자 시위에서 ‘우리는 왼손잡이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했어요. 타고난다는 거죠. 왼손잡이를 소수자의 상징으로 쓸 수 있겠다 싶었죠. 저는 오른손잡이지만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곡을 꾸준히 만들어 왔어요. 최근 낸 ‘돌팔매’라는 곡은 인터넷에서 한 사람을 조리돌림해 악마로 만드는 상황을 담고 있죠. 제겐 사람들이 모르는 곡도 많아요. 공연이 매진되기 시작한 것도 데뷔하고 12년 후였어요.”

-시간이 지나 사랑받는 곡들도 있죠.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은 기아(棄兒)를 다룬 곡이에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 아빠가 되고 나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썼어요. 나중에 이 곡은 거대한 상실감을 겪은 사람, 유기동물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 불렸죠. ‘거위의 꿈’은 인순이 선배를 통해 국민가요가 되고, 아프리카 아이들도 부르고요. 저와 (김)동률이가 방 안에서 이 노래를 만들 땐 아프리카에서 불릴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어요. 양희은 선배는 ‘노래엔 각자의 팔자가 있다’고 하세요. 전 이제 톱스타가 아니에요. 음반이 나왔다고 모두가 듣지 않아요. 뉴진스 같은 팀은 앨범이 나온 날 온 국민이 듣잖아요. 그럼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음악을 해야 하나. 충실히 만들어 세상에 풀어놓으면,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다 이렇게 돌아오는 거죠. ‘이걸 내놓으면 짠하고 뜨겠지’ 하면 죽도 밥도 안 되고(웃음).”

-작업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은?

“상업적으로는 참패했지만 매우 즐거웠던 작업이 밴드 ‘긱스’요. 제가 오렌지 머리도 하고. 동료들은 ‘왜 괜히 그런 걸 해서’라고 하지만, 그게 한국에서 날고 긴다 하는 연주자들과 만든 밴드거든요. 저는 형·동생들한테 많이 배웠고, 그 후 음악하는 데 굉장히 보탬이 됐죠.”

-음악 시장은 아이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제가 지금 태어났어도 아이돌은 안 됐을 거예요. 홍대에서 인디 노래를 하고 있겠죠. 아이돌이 되려면 춤과 노래 등이 타고나야 해요. 부럽고 신기하고. 간혹 후배들을 만나면 ‘저희 백악관 다녀왔어요’라고 한단 말이에요. 저는 ‘청와대 가봤다’고 말하던 시대거든요(웃음). 필드 자체가 바뀐 것 같아요. 선진국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 영어가 장애가 아닌 세대, 한국적인 것을 해도 먹힌다는 것을 아는 세대.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 강국’. 영화계도 마찬가지고. 제가 어렸을 때는 한 번도 세계 일류였던 적이 없었어요. 쫓아가야 하고, 모든 것이 부족했고. 제가 74년생인데 전쟁 끝나고 20년 후에 태어났더라고요. 올해가 2002월드컵이 지난 지 21년 됐잖아요. 전쟁이 ‘가까운 과거’인 저희 세대와는 비교가 안 돼요.”

-악마와 계약한다면 어떤 재능을 갖고 싶나요?

“스티비 원더처럼 음악을 듣고 만들 수 있는 재능. 그런 음악가들은 귀에 음악이 더 디테일하게 들린데요. 화가들이 색을 더욱 분석적으로 보는 것처럼요. 그런 천재들의 재능이 탐나요.”

-곡은 어떻게 쓰나요? 영감을 받으면 화르르?

“남들이 보기에 무의미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해요. 우리가 뭘 먹어야 손톱이 자라는지 모르잖아요? 많이 듣고, 읽고, 멍 때리는 시간이 있어야죠. 누군가가 곡을 써 달라고 하면 제가 ‘두 달을 달라’고 해요. 그런데 두 달 내내 곡을 쓰는 건 아니죠. 마지막 이틀에 완성되는 경우가 많죠. 그럼 처음부터 이틀만 줘도 되느냐? 그건 또 아니에요. 무의미한 한 달 하고도 28일이 필요한 거예요.”

-AI 시대 뮤지션의 역할은 어떻게 바뀔까요.

“일자리가 많이 줄 거예요. 브루노 마스나 마이클 잭슨 같은 목소리를 만들 수 있고, 하루에 10만곡씩 쓸 수도 있겠죠. 그중 좋은 곡이 한두 개라도 안 나오겠어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

“콘서트 할 때요. 온몸으로 전율을 느껴요. ‘싱어송라이터’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이유예요. 신나는 곡을 부르면 모두가 흥분해 있어요. 혼자 기타 치고 노래하면 들숨 날숨이 맞아가요. 소름이 확 끼치죠. ‘미친 듯이 집중해서 듣고 있구나’를 느끼거든요. 무슨 복으로 내가 이걸 누리나 싶죠.”

-후배 양성 계획은.

“제가 회사를 만들어 운영할 성격도 안 되고, 후배들이 선배 회사에 들어갔다가 마음 상하는 것도 많이 봐서 관심 없어요. 대신 후배들 음악은 많이 들어요. 잘하는 친구 있으면 여기저기 소문도 내고. 후배들이 ‘송캠프(집단 창작) 같이 하자’고 하면 참여할 의사도 있고요. 그래도 저만의 음악은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 마라탕이 유행한다고 모두가 마라탕집만 한다면 안 되지 않을까요? 저는 꾸준히 맛을 내는 설렁탕 집을 하고 싶은 거죠!”

-협업하고 싶은 후배가 있나요?

“있긴 한데, 그들이 하자고 해야 하지, 제가 하자 그러면 거절하기 곤란한 친구들도 있을 거고. 전 후배 등에 타는 느낌이 너무 싫거든요. 콘서트 게스트 없앤 지도 오래됐어요. 물론 그들이 원하면 전 기쁜 마음으로 가요. 앞으로도 협업하고 싶은 선배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이적이 낸 베스트셀러 ‘이적의 단어들’. 그는 “글이 늘어지는 걸 막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활용했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작가: 작사하듯 쳐내고 압축한다

-인스타그램 글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출판사와 계약하고 글을 쓰는데 중언부언 잘 안 써지는 거예요. 늘어진 글을 보다 마음에 안 들어 인스타그램을 통해 압축하자고 생각했죠. 피드백도 받고.”

-과거에 트위터로도 했죠?

“2010년인가. 트위터가 막 생겼을 때 픽션 쓰기를 했어요. 제 홈페이지에서 구독을 받아, 이메일로 보내주던 글들이에요. 알파벳으로 140자이니깐. 이 글자 수 안에 픽션 쓰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죠.”

-글이 늘어지는 걸 싫어하나 봐요.

“가사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불필요한 것들을 쳐내고, 압축해서 ‘이 이상 덜어내면 의미 전달이 안 된다’ 수준까지 줄이고 싶어요.”

-기자들이 많이 듣는 이야기네요.

“스티븐 킹이 말했죠. 부사 이런 거 다 빼라고. 그 말도 맞죠. 그런데 저는 부사를 이용해 분위기를 바꿀 때도 많아요. ‘거위의 꿈’에는 ‘남루’라는 단어가 있어요. 꿈이 너덜너덜해져 누더기가 된 것이 떠오르죠. ‘하늘을 달리다’에서는 ‘마른’과 ‘설혹’이라는 부분이에요. 푸른 하늘보다 마른 하늘이 태양 가까이 달리는 느낌이 나죠. ‘혹시’보단 ‘설혹’이어야 하고요.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한 편 쓸 때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며칠. ‘이게 아닌데’ 하고 막히면 처음부터 다시 쓰고. 몇 주가 흘러도 답이 안 나오면 버려요. 꾸역꾸역 만들면 뭔가 부자연스럽더라고요.”

-글이나 말로 상처도 받아봤나요.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죠.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을 때도 있고요. 일일이 반박하면 페이스에 말려들기 때문에 ‘그냥 짖어라’ 할 때가 많아요. 분에 넘치게 좋은 얘기도 많이 듣기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좀 잘 잊어요. 제 아내는 저보다 더 잘 잊고요. 그래서 결혼했어요.”

이적은 음악 이야기를 할 때면 진지해지고, 아내와 두 딸 이야기를 할 때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후배들 음악을 많이 듣는다는 그는 “후배들이 협업하고 싶은 선배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가족: ‘다행이다’로 프러포즈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나요?

“중학교 선배의 처제예요. 그 부부가 불러서 같이 논 적이 있는데, 그땐 아무 감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김현철 형이 형수 친구들과 있다고 놀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내가 있는 거예요. ‘여기 웬일이에요?’ 하다가 사랑에 빠졌죠. 첫눈이 아닌 두 번째 눈에(웃음).”

-’다행이다’가 프러포즈 곡이더라고요.

“아내가 해외 유학할 때에요. 여자친구를 위한 노래를 하나 만들고 싶어 국제전화로 불러줬죠(”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원래 1절만 있던 곡인데 동률이가 듣고는 앨범에 싣자고 해 타이틀곡이 됐어요. 제가 그 정도로 오글거리는 사랑 노래는 써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머니가 ‘방목형 교육’으로 유명하신데요.

“방목형인데 애정도 스킨십도 많으셨어요.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거지, ‘나 뭐 해야 하니깐 들어오지 마’ 이런 게 아니었죠. 큰 테이블에 온 가족이 앉아 각자의 일을 했죠. 어머니는 공부하고, 저는 숙제하고, 형제 중 누구는 시험 공부하고. 제가 딸들한테도 비슷하게 하는 거 같아요.”

-딸들이 아직 사춘기는 안 왔나요?

“첫째가 중1인데, 초 3~4학년 때 이미 ‘아빠가 뭘 안다고 그래?’를 해서. 하하. 요새는 아빠가 뭘 아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딸들과 소파에 누워 티키타카 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아빠, 오늘 누가 누구랑 사귄대’ 이런 이야기를 친구처럼 하거든요. ‘난 아버지한테 이 정도까지는 안 했는데, 이 친구는 해주는구나, 되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누르지 않아요. 나쁜 일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좋은 일도 없어지고, 제 딸들도 없잖아요. 저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매우 예민하고 날카롭고 불안정했거든요. 물론 ‘더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있죠.”

-그림책을 낸 건 딸 때문이라고요.

“딸이 4살 때 A4용지 여러 장을 스테이플러로 찍어 ‘별이 나오는 그림책을 만들어줘’ 하는 거에요. 그래서 별과 혜성이 70년마다 만나 친구가 된 이야기 ‘기다릴게, 기다려 줘’를 썼죠. 딸은 늘 아빠에게 숙제를 내요. 그런 게 영감을 줄 때가 많죠.”

-’아빠, 내가 벌레가 된다면?’이라고 묻는다면.

“좋은 집 만들고, 맛있는 거 주면서, 잘 키워야지! 그게 카프카의 ‘변신’이 밈처럼 된 거잖아요? 카프카가 그 이야기를 살롱에서 했을 때 빵빵 터졌대요. 유머였던 거죠. 제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가지는 단어도 ‘유머’예요. 넷플릭스에서 즐겨보는 것도 스탠드업 코미디,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사인필드’요.”

-딸들이 음악을 하겠다고 하면요?

“요즘엔 자녀가 예체능 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이 기뻐한대요. 잘되면 부와 명예를 다 얻을 수 있으니. 그래서인지 좋은 음악, 영화가 덜 나온다는 말도 있어요.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은 영화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던 시절에 한 사람들이잖아요. 지금은 영화 하고 싶다면 카메라 사주고, 학원 보내고, 그러는 순간 흥미가 싹 사라지는 게 예술이니. 음악도 몰래 하는 작업물과 ‘지금부터 힙합을 공부해볼까?’ 하며 나오는 작업물과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한 소설가가 ‘요즘 애들이 소설을 읽게 하려면 소설을 금지하면 된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러면 몰래 지하철에서도 보고, 이불 속에서도 보고 한다고.”

-이석증을 앓고 있다고요.

“10년 전쯤 생겼어요. 어느 날 자다가 몸을 뒤척이는데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처음엔 엄청 공포스러웠어요.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이거든요. 평생 이러면 어쩌나 싶고. 지금은 다루는 법을 알게 됐어요. 오른쪽으로 누워 자면 덜 생겨요. 어깨와 내장이 변형된다고는 하던데.”

중년을 지나고 있는데 앞으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었다. 이적은 “자유롭게”라고 답했다. “누군가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의미 있게 살자’고 할 테고, 누군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남들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고 할 테고. 저는 둘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해야지’는 허망할 때가 많아요. 진짜 언제 갈지 모르잖아요.”

[아무튼주말] 이적 (이적의 단어들) 인터뷰영상_이건송 <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