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 화가 천경자를 아는가? 그녀가 태어난 약 100년 전 시대에는, 살아 있는 동안 대중적 성공을 누린 화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천경자는 예외였다. 그녀는 데뷔 전시부터 요란해서,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한 단체전에 뱀 35마리가 우글거리는 작품을 출품해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뱀 그림은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전시되지 못하고 주방에 치워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대중에게 천경자가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1973년 현대화랑 개인전은 시간당 입장객 수를 제한할 만큼 인기가 있었고, 작품은 전부 매진됐다. 이후 아프리카·남미·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현지 풍물을 담은 작품도 전시되는 족족 팔렸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을 때는 직전에 열린 샤갈 전시보다 많은 관객으로 붐볐다. 개막식에 꽃으로 머리 장식을 하고 나타나, 언제나 화려하고 강렬한 패션 센스를 자랑한 천경자는 요즘 말로 하면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다. 그녀의 유례없는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머니에게 받은 재능

1994년 본지 인터뷰 당시의 천경자 화가. / 조선일보DB

천경자가 처음부터 성공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정반대에 가까웠다. 그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청에 다녔지만, 양말 공장을 하다가 망한 적이 있고,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무골호인이던 그는 자주 기생과 어울려 부인을 힘들게 했다. 한편 천경자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외동딸로 태어나 남장을 하고 서당을 다녔던 어머니는 박식했고 부지런했으며, 천경자의 표현으로 “현대에 살았으면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할 만큼 재주도 많았다. 1986년 타계할 때까지 평생 천경자의 옆을 지키며 든든한 지원군이 돼줬다. 천경자는 어머니를 자신의 신앙이자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없는 살림에 천경자가 일본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분이었다. 천경자의 부친은 우리 살림에 무슨 일본 유학이냐며, 만약 유학을 간다 해도 의대를 가라고 주장했지만, 천경자는 그 앞에서 미친 척하는 메소드 연기를 펼쳐 허락을 얻어냈다. 그리고 천경자의 어머니는 패물을 팔아 유학을 지원했다. 1941년 천경자는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평탄하지 않은 운명

1964년작 ‘여인들’. 화사한 채색과 구성으로 현실 너머의 환상적 세계를 드러낸다. ⓒ서울시

부잣집 소녀들이 다니는 이 학교에서 천경자는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비가 오면 다른 친구들은 모두 알록달록 예쁜 파라솔을 말린다고 복도에 좌악 펼쳐놓는데, 외할머니에게 받은 자신의 못생긴 파라솔만은 우산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창피하고 비참해서, 천경자는 나중에 자신의 작품에 각양각색 짱짱한 파라솔을 자주 등장시켰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로망’을 그림에서는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지 않나. 현실의 어려움이 강하면 강할수록, 천경자는 더욱 회화의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과 환영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현실이 더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집안이 망해 있었고, 그 이유가 자신의 유학비 때문이라는 주변인들의 뒤틀린 원망을 감내해야 했다. 귀국길에 만난 한 남성과 1944년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는데,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러 이혼이 불가피했다.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학생을 가르치고, 점심 시간이 되면 천경자의 어머니가 데리고 온 자신의 아들에게 젖을 물리고, 저녁에는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작품을 그려 모아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거기서 만난 한 남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그는 유부남이었다. 천경자의 영혼의 단짝이었던 여동생 옥희는 폐결핵에 걸렸건만,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돈을 구하지 못해 제대로 약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고 엉망진창이었다.

◇뱀을 그리는 화가

화가의 절망적 상황이 광기처럼 우글대는 서른다섯 마리 뱀으로 표현된 1951년작 ‘생태’. ⓒ서울시

바로 그런 상태에서 나온 작품이 천경자의 데뷔작 ‘생태’(1951)였다. 우중충한 배경에 우글거리는 뱀 서른다섯 마리가 생생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이전의 어떤 동양화 전통에도 없던 기이한 도상이다. 실뱀들은 서로 구불거리고 뒤엉킨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징그럽게 혀를 날름거린다. 이런 작품을 20대의 여성화가가 그렸다니.

원래 천경자는 매우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파라솔 하나에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며 슬픔에 빠져드는 인물이었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다면, 그녀는 기쁜 것도 매우 기쁘게 느끼고, 슬픈 것도 사무칠 정도로 슬프게 감지하는 성향을 지녔다. 요즘 말로 하면, MBTI에서 극F에 해당하는 유형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그녀가 세상의 시련을 한꺼번에 직면했을 때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의 상태를 상상해 보라. 슬프고 애절한 것이 쌓이고 넘치면, 그저 살아야겠다는 ‘오기’만 남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천경자는 광기에 가까운 힘을 발휘해 우글우글 뱀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뱀 그림을 그리던 상황은 천경자 인생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후 유부남이었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더 낳았고, 모두 네 명의 자녀를 기르며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화가로 살아야 할 운명을 맞이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점을 보러 갔다가 눈썹이 가늘고 길어 “형제 복이 없고 첩살이를 할 운명”이라는 점괘를 받은 탓일까? 천경자의 인생은 불안과 긴장감, 그리고 찰나의 행복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이런 불안과 행복이 뒤엉킨 상태에서 그린 천경자의 1960년대 작품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당시 그녀의 작품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우면서 미세한 불안감으로 떨린다. 이른바 ‘여성적 감수성’이 너무도 솔직하게 표현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이다. 통상적으로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오류’로 치부돼 오던 것들, 연약함, 불안감, 헛된 희망 같은 것이 천경자의 작품에서는 본격적인 주제로 등장했다. 슬프고 청승맞고 부서질 듯 여린 감성이 꿈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됐다. 샤갈 부럽지 않은 환상적인 작품들이다.

◇다시 태어난 화가

1977년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천경자는 1969년 남미와 유럽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고, 이후 남편과 결별했으며, 확연히 달라진 화풍으로 당당히 과거를 마주한다. ⓒ서울시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긴장된 줄타기를 계속할 것인가? 천경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1969년 천경자는 남편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남미와 유럽으로 8개월간의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운명의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네 자녀를 위해서라도 세상의 온갖 치욕과 설움을 견디며 반드시 성공한 화가가 돼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과 자녀의 생존을 위해서 그녀는 좌절할 여유가 없었다.

놀랍게도 이 여행을 거친 이후, 천경자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1973년 드디어 남편과 완전히 결별했고, 직접 자서전을 쓰면서 이전의 생애를 정리해 나갔다. 무엇보다 화풍이 확연히 달라져서 훨씬 세밀하고 확신에 찬 표현을 구사했다. 1977년에 그린 자화상은, 천경자가 혼란의 시기를 통과하고, 드디어 온전히 ‘다른 자아’로 재탄생했음을 선언하는 작품과도 같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뱀을 마치 화관(花冠)처럼 머리에 두른 천경자의 젊은 시절 자화상이다. 53세가 된 천경자가 자신의 22세 때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다. 그제야 비로소 천경자는 자신의 불안했던 청년기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뱀은 더 이상 불길하고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라, 화가 자신을 세파의 온갖 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스스로에게 씌운 왕관과도 같이 작동한다. 이제 그녀의 작품에는 1960년대의 불안과 환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모든 표현이 분명하고 카리스마 넘친다. 하지만 이렇게 단련되기까지 천경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을 삼킨 것일까.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면, 천경자 작품의 저변에 언제나 흐르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천경자에게 성공을 안긴 대중

제목과 화면에 화가의 염원이 담긴 1969년작 ‘언젠가 그날’. ⓒ서울시

그래도 천경자의 주변에는 그녀를 인정해 주는 동료 예술가들이 있었다. 화가 김환기는 부산 피란지에서 천경자를 처음 만난 후, 1954년 그녀를 홍익대 교수로 초빙해 일자리를 제공했다. 조각가 윤효중은 홍익대 학장 시절, 천경자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둘째 아이를 임신하자 도저히 면목이 없어 사표를 들고 찾아갔을 때 “선생이 무슨 교육자입니까, 예술가지요”하며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계속 교수로 지내도록 배려했다.

천경자가 갑자기 대중의 주목을 받아 성공 가도에 오른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그녀는 타고난 감수성을 발휘하여 1950년대부터 수필가로 활동했는데, 1970년대에는 아예 자서전을 써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림은 안 팔리는데 인세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천경자는 자신의 치부라고 할지도 모를, 곡절 많은 인생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자서전에 풀어냈다. 어찌하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흘러왔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선택을 했고, 이는 뭇 한국 여성들의 엄청난 공감과 응원을 불러 일으켰다.

사실 한(恨) 많은 일생을 산 이 땅의 여성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다만 천경자가 대단했던 점은 그 한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예술 작품의 소재로 삼아 그림으로 글로 쏟아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는 천경자의 시대를 공유한 여성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천경자를 성공시킨 것은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성장한 한국 여성 대중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한 화가가 돼 아이들을 떳떳하게 키우겠다는 천경자의 한결같은 소망은 대중의 바람에 힘입어 진짜 현실이 됐다. 천경자는 보답을 잊지 않았고, 1998년 살아있을 때 이미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공립미술관에 작가 개인의 전시공간이 상설전 형식으로 들어간 것은 천경자가 처음이었다. 천경자는 실로 많은 진기록을 낳았던, 희대의 예술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