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

2012년 김능환 대법관이 한 말이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1941년부터 3년간, 여모씨 등 4명은 일본제철에 강제로 끌려가 고된 노역을 했다. 일본이 패망한 뒤 귀국하긴 했지만, 그간의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1997년, 여씨 등은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다. 밀린 임금과 손해를 배상해 달라는 것. 하지만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채무가 소멸됐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자 여씨는 2005년, 대한민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낸다. 1심과 2심은 ‘시효가 소멸됐다’는 점 등을 들어 기각했지만, 2012년 대법원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대법원 1부 주심이던 김능환이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확정판결이 나기까지 그로부터 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파기환송이니만큼 고등법원을 거쳐 다시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대법원은 판결을 계속 미뤘다. 그러던 2018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장을 위시한 전원합의체는 김능환 대법관이 내린 판결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 뒤 일어난 일은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해 말, 여씨의 변호인단이 한국 내 일본기업의 자산압류 절차에 돌입했다. 일본 측이 반발하자 조국 당시 민정수석은 죽창가를 불렀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결국 일본 아베 총리가 우리나라에 수출통제 조치를 내린 것을 시작으로 ‘노재팬(일본 상품 불매)’ 목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쳤다. 이 싸움으로 대한민국이 어떤 이득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일로 인해 문 정권의 지지율이 올랐고, 이는 이듬해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예컨대 당시 윤미향 비례대표 후보는 선거 홍보물에 “21대 총선은 한일전이다”라고 큼지막하게 써놨는데, 이런 선동에 넘어간 이가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아쉬운 점은 다음이다. 광우병과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에서 보듯 좌파 정치인들이 말도 안 되는 선동을 하는 거야 늘 있던 일이지만, 여기에 대한 빌미를 우리 법원이 줬으니 말이다.

헌법 103조는 법관이 ‘외부 간섭 없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양심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업적 양심을 뜻하며,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에서 법관의 신분을 헌법과 법률로 보장하는 것도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정경심이 입시비리 등으로 징역 4년을 받고, 김경수가 드루킹 사건으로 징역 2년을, 김은경 전 장관이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징역 2년을 받은 것도 사법부의 독립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김능환의 말은 법관으로 해서는 안 되는 망발이었다.

하지만 김능환은 서막에 불과했다. 문재인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6월 15일 판결을 보자.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하는 대신, 불법 파업에 대해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한다. 회사 측이 입은 손해를 노동자에게 배상하게 하는 것은 그 한 방법. 그런데 노정희 대법관을 주심으로 하는 대법원 3부는 노동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했던 1, 2심 판결을 뒤집고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원래 정의당과 민주당은 불법파업을 한 노동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완전히 없애려는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키려 애쓰고 있었는데, 이 판결이 판례가 돼서 다른 판결을 구속한다면, 무리하게 법안 통과를 밀어붙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런데 노정희가 좌파 판사의 사조직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이고, 선관위원장 시절 편파적인 선거관리를 하다 사임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 판결이 과연 ‘헌법과 법률에 의한 심판’인지 의문이 든다. 그런가 하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역시 우리법연구회 소속인 김미리 판사에게 조국 전 교수의 재판을 맡겼는데, 그녀는 재판을 질질 끌더니 몸이 안 좋다며 휴직을 해버렸다. 덕분에 조국은 기소한 지 3년 2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났고, 그간 1억이 넘는 돈을 월급으로 챙겼으며, 내년 총선에도 출마가 가능해졌다. 김미리가 재판 도중 “검찰수사는 검찰개혁을 시도한 조국에 대한 반격이라는 시각이 있다”는 황당한 얘기를 한 점,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이 나온 조국 동생에게 1심에서 겨우 징역 1년을 선고한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조국 재판을 지연시킨 것은 자신의 좌파적 세계관이 작용한 결과일 듯싶다.

3년 5개월 전 기소가 이루어진 울산시장선거개입이 아직 1심 판결도 내려지지 않은 데도 김미리의 공이 크다. 기사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 사건의 첫 재판장을 맡았던 김미리 부장판사는 준비 기일만 6차례 열었을 뿐 1년3개월간 본 재판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 김 판사가 지난 4월 갑자기 휴직에 들어가는 바람에 새 재판부는 기소 이후 무려 1년 4개월 만인 지난 5월에야 첫 본재판을 열었다.” 덕분에 울산시장 선거 당시 울산지방경찰청장이었던 황운하는 의원 임기를 다 마치는 것은 물론 내년 총선에도 출마할 수 있게 됐으니, 김미리에게 사건을 몰아준 보람이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 군에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축이 된 하나회는 요직을 모조리 독점하는 등 세를 불려 나갔는데, 하나회 규율 중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었다.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니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우리법연구회는 법관들 모임이니 좀 다를까? 그렇지 않다. 하나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법연구회는 좌파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요직을 독점했고, 일반인의 법감정을 벗어난 판결로 모임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 2020년 있었던,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에 관한 재판에서 대법원은 정치인이 허위사실을 말할 권리를 ‘숨 쉴 권리’라 표현하며 최종 스코어 7대5로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의 김명수와 노정희, 그리고 화천대유 50억 클럽의 주인공 권순일까지 있었으니, 이재명 측이 도저히 질 수 없는 시합이었다. 김능환의 판결로 빚어진 한일관계 악화는 윤석열 대통령이 겨우 풀어냈지만, 김명수 등의 판결로 빚어진 이재명의 패악질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래서 말한다. 문재인 정권 최악의 잘못은 사법의 정치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