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옛 기억이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감성을 더한 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세기 말의 신일 선풍기, 포니 자동차도 시장으로 돌아왔다. 신상품이 차고 넘치는 요즘, 역설적이고 퇴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레트로’. 그 열풍의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과거의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잠시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추억이 다시 현재가 되다
30대 이모씨는 최근 대형마트에 갔다가 선풍기를 구입했다. 박스에는 ‘레트로 에디션, 미려하고 견고한 신일 선풍기’라고 적혀 있다. 집에 선풍기가, 또 에어컨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릴 적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썰어주던 시골 할머니 생각에 덜컥 사버렸다. 파란색 날개에 작동 방식도 플러그를 꽂아 쓰는 예전 그대로다. 당연히 무선도 아니고 리모컨도 없다, ‘딸깍’ 하고 레버를 움직여줘야 바람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수고가 들어가지만,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지-직-’거리는 모터 소리가 거슬리긴 하지만, 잃어버린 과거를 산 듯한 느낌이에요.”
진짜 1980년대에 만들어진 선풍기가 수십만원대에 중고로 거래되기도 한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저보다 나이 많은 아이 팝니다. 골드스타(럭키금성, LG의 과거 이름). 부모님이 신혼 때 장만한 오리지널. 25만원에 직거래해요”란 글이 올라와 있다.
10~20대 사이에선 레트로의 하나인 ‘Y2K(세기말) 감성’이 유행이다. 배꼽티, 허리까지 올라오는 배바지 등 패션을 따라 하는가 하면,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트렌드가 스며 있는 복고풍 디지털 카메라, 즉석 카메라, 필름 카메라를 사들인다. 아빠가 쓰던 캠코더를 꺼내 몽롱하고 흐릿한 분위기의 영상을 찍는다. 잡티 하나까지 다 잡아내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비해 화질이 낮은 것이 매력이다. 굳이 보정하지 않아도 예뻐 보이는 마법이라나. 한 블로거는 아마존에서 구입한 빈티지 카메라 사진을 올리곤 “촌스러운 게 힙하다”고 썼다. 10~20대가 전통 디저트인 약과, 인절미 등을 먹고, 할머니가 입던 꽃무늬 치마나 니트를 입는 ‘할매니얼(할머니와 밀레니얼의 합성어)’을 즐기는 것도 레트로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
사람들은 추억에 열광한다. 그래서 유행은 돌고 돈다. 젊은 층이 조선의 나이키라는 ‘프로스펙스’ 매장에서 오픈런을 하고, 첫 국산차인 포니의 전시장에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현대차는 1990년 단종된 지 33년 만에 포니 시리즈를 복원해 공개 중이다. 당초 전시는 8월 6일까지였지만, 공개 1주일 만에 5000명이 몰리자 10월로 연장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은 아니다. 작년 미국에서도 LP판이 CD보다 많이 팔렸다고 한다. 1987년 이후 처음이라고. 디지털화가 심화되면서 무언가를 영원히 소유하기보다는 인터넷 스트리밍처럼 서비스나 체험을 구입하는 ‘비물질적 소비’가 늘어났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아날로그가 희소가치가 된 것이다.
조연주 미디어 심리학 박사는 레트로가 유행하는 배경으로 경제 불황,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꼽았다. “경제 위기 등이 올 때 향수는 현재의 어려움을 벗어나게 하는 감정적 해독제 역할을 한다. 또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옛것의 여유를 음미하며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채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