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트 투 덴마크(Flight to Denmark)>를 들으며 덴마크를 떠올린 시절이 있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된 숲에 무채색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 앨범 재킷을 보면서. 이 남자가 아마 앨범의 연주자인 듀크 조단(Duke Jordan)일 텐데 덴마크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마음으로부터 울리는 서정적이면서 몽환적인 타건을 들으면서 덴마크가 어떤 곳이길래 저러나 싶었다.
그럴 만한 사연을 나중에 들었다. 재즈의 부흥기가 지난 미국에서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던 이 남자는 덴마크 재즈 애호가들의 초청으로 갔던 덴마크에서 인생이 바뀐다. 6주간의 유럽 순회공연을 하고, 인기를 얻고, 앨범을 발매한다. 끝난 줄 알았던 음악적 커리어가 덴마크에 와서 다시 시작되고, 그 결과 나까지 듣게 되었다. 음악을 거의 안 듣는 동아시아인인 내가 들을 정도까지 그의 앨범은 유명해진 것이다. 그러니 덴마크란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단어일지.
칼스버그를 마실 때도 듀크 조단과 덴마크에 대해 생각한다. 덴마크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이나 은세공 장인 조지 젠슨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만 어쩐 일인지 미국인인 그가 먼저 떠오른다. 덴마크 맥주인 칼스버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먼저였을까?
거의 매일 칼스버그를 마시고 있다. 한동안은 아이피에이였는데 요즘은 칼스버그를 마신다. 칼스버그의 투명함? 청량감? 가벼움? 이런 미덕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아이피에이의 쓰고 진한 맛도 여전히 좋지만 가벼운 맥주들이 새롭게 느껴진달까. 여름이라서, 이제는 동남아 같은 기후로 바뀐 후덥지근한 여름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길 수 없다면 날려버리자. 마셔서 날려버리자. 한없는 가벼움으로 이 텁텁함을 마셔서 없애버리자. 이런 자기 최면인 걸까.
덴마크 발음으로는 ‘칼스버그’가 아니라 ‘칼스베어’에 가깝다. 조지 젠슨(Georg Jensen)이 사실은 게오르그 옌센이고 조지 젠슨은 영어식 발음인 것처럼, 칼스버그도 칼스베어인 것이다. 하지만 칼스버그는 칼스버그여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지 않았나 싶다. 북유럽 이름답지 않게 간명하게 들리는 이 단어는 듣자마자 귀에 꽂히는 미덕이 있다.
코펜하겐 근처 어느 마을의 이름인가 싶었던 칼스버그가 사실은 창업자 아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 이름이 칼(Carl)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공장이 위치한 언덕이라는 의미의 berg를 붙여 ‘칼스버그(Carlsberg)’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덴마크어에서는 소유격을 만들 때 어퍼스트로피 없이 그냥 s를 붙인다고. 아들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애틋한 부성애를 알 수 있는 이야기라서 한 게 아니다. 얼마나 아들이 소중했던지 맥주 이름에까지 아들 이름을 붙였던 아버지는 훗날 후회하게 된다. 그렇다. 자라서 사업에 참여하게 된 아들이 아버지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고. 자신은 라거를, 아들은 포터나 에일 맥주를 만들기 원했던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아들도 라거를 만들겠다고 한다거나. 아버지는 연간 생산량을 제한하려 하는데 아들은 대량 생산을 주장한다거나. 예술품에 대한 견해 차이도 있었다. 프랑스 현대 조각을 컬렉팅하며 헛돈(아버지 입장에서)을 쓰는 아들의 미감을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싸움의 경과가 흥미롭다. 일단, 아버지는 이름을 못 쓰게 했다. 아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칼스버그를 아들이 만든 맥주에 못 쓰게 한 아버지 덕에 아들은 ‘뉴칼스버그’라는 상표로 맥주를 만든다. 그리고 칼스버그와 뉴칼스버그는 싸운다.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표지판을 점점 크게 만드는 유치찬란한 일도 포함해서. 법정에서까지 다퉜던 부자는 6년에 걸친 소송 끝에 화해한다. 6년이나 법정에서 싸웠으면서 대체 어떻게 화해를 한 건지가 나는 가장 궁금한데, 이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화해로 칼스버그와 뉴칼스버그는 칼스버그가 되었다고.
아버지에게 심미안을 의심받았던 아들의 컬렉션으로 미술관까지 개관한다. 그 미술관은 글립토테크 미술관으로 해마다 40만 명이 찾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명소가 되었다고. 그리스어로 ‘조각관’이라는 뜻인 ‘글립토테크(Glytotek)’라는 이름답게 조각이 많다는 미술관의 홈페이지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3차원의 예술이 인간의 기본 조건에 가장 가깝다고 믿어서 조각에 매료되었다고. 덴마크의 그 유명한 인어공주 동상도 이분께서 조각가에게 의뢰, 덴마크에 기증했다고 한다.
로댕의 작품이 가장 많은 곳이 프랑스가 아니라 바로 이곳, 글립토테크라는 말을 먼저 들었었다. 대체 왜 코펜하겐에 로댕 작품이 가장 많은지 궁금해하다가 칼스버그 가문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시작은 파리 7구에 있는 로댕미술관에서였던 것 같다. 인간의 모습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돌에 새겨둔 로댕의 작품들을 보면서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고, 많은 작품이 코펜하겐에 있으며, 그 이유는 칼의 집요함 덕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칼스버그는 그냥 마셔도 좋지만 칵테일을 만들어 마셔도 좋다. 맥주로 만드는 칵테일 중에 샌디 개프(Shandy Gaff)라는 게 있다. 샌디 개프를 만들기에 최적화된 게 칼스버그다, 라는 게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진저에일 반, 맥주 반을 섞어 만드는 게 샌디 개프다. 진저에일의 생강 맛에 맥주의 약한 단맛과 쓴맛과 조화가 상당하다. 맥주를 먼저 붓고 진저에일을 나중에 부어주기만 하면 된다. 독일에 라들러가 있다면 미국에는 샌디 개프가 있달까. 영국에서는 비터 샌디(Bitter Shandy)라고 한다는데, 둘 다 어감이 좋다.
듀크 조단은 칼스버그를 많이 마셨겠지. 많이 마시지 않았더라도 많이 마셨을 거라고 생각하며 칼스버그를 마시는 지금 <플라이트 투 덴마크>를 듣고 있다. 인생을 낙관하는 여유의 저 터치가,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