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이끄는 경제사절단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삼성전자·SK그룹·LG그룹 등 주요 기업 오너와 경제단체장으로 꾸려진 진용. 여기에 인기 힙합 가수 박재범(36)씨가 있었다. 강원도 원주 쌀로 빚은 전통주 ‘원소주’ 개발자 자격이었다. 지난해 출시한 ‘원소주’가 젊은 세대의 열광적 반응으로 500만 병 넘게 팔리고 미국에도 수출되는 대박을 일궈내면서 차세대 소주 산업을 대표해 참석한 것이다. 이날 만찬장에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박씨는 베트남 기업인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소주 마케팅에 나섰다. 태국·홍콩에도 진출한 ‘원소주’는 본격적인 동남아 시장 공략을 준비하고 있다.

차세대 소주 산업을 대표해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베트남 경제사절단에 합류한 가수 박재범. 사진은 지난해 박재범이 직접 개발한 '원소주' 발매 당시 모습. '원소주'는 전통주로 분류된다. /현대백화점

지난달 국세청이 발표한 ‘주류 출고량 현황’에서 유일하게 5년 연속 상승 곡선을 그린 시장이 있다. 전통주다. 4년 연속 내리막이던 국내 술 시장 전체 규모가 지난해 처음 코로나 방역 완화에 힘입어 고개를 든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지난해 전통주 출고량은 2만9500kL, 전년보다 약 60% 뛰었다. 처음 1000억원대 매출에 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공이 거듭되면서, 예스럽고 투박한 그래서 주로 ‘할배 술’로 여겨졌던 전통주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전통주 술도가 남한산성소주 측이 내놓은 딸기·바나나맛 ‘딸바막걸리’ 같은 이색 제품이 쏟아지고, 요식 업계 최강자 백종원, 배우 김보성, 트로트 가수 송가인까지 속속 주조(酒造)에 뛰어들고 있다.

◇非주류에서 新주류로

전통주 플랫폼 술담화 집계 올해 상반기 전통주 판매 TOP10. /그래픽=송윤혜
전통주 플랫폼 술담화 집계 올해 상반기 전통주 판매 TOP10. /그래픽=송윤혜

섞으니 젊어진다. 직장인 최재훈(30)씨는 얼마 전 퇴근 후 편의점에 들렀다가 야쿠르트 맛 막걸리 ‘막쿠르트’를 발견했다. 막걸리에 HY(한국야쿠르트)가 50년 넘게 제조 중인 뽀얀 살구빛 추억의 야쿠르트를 첨가한 제품이다. 최씨는 “목말라 맥주를 사러 갔다가 신기해서 집어 들었다”며 “냉동실에 넣어 슬러시처럼 살짝 얼려 먹었더니 식후 음료로 제격이었다”고 말했다. 세 살 입맛에 여든 살 입맛을 섞어 야쿠르트 용기에 담은 6도짜리 이색 술에 ‘어른이’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지난해 11월 한정 출시된 ‘막쿠르트’는 온라인으로만 당일 2000병, 10일 만에 1만 병이 팔려나갔다.

전통주의 취기를 선도하는 건 ‘MZ’를 필두로한 2040세대. 식용 펄(pearl)을 넣어 병을 흔들면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소주 ‘인어교주해적술’ 등의 참신한 콘셉트, 부드러운 풍미, 다양한 도수(度數)를 앞세운 제품이 이들의 입맛에 적중한 것이다. ‘롤스로이스 막걸리’로 불리며 한 병에 10만원이 넘는 프리미엄 전통주 ‘해창막걸리’의 경우 계(契)까지 조직해 사먹을 정도로 소문만 나면 구매는 가격 불문이다.

술집 대신 집에서 홀짝이는 ‘혼술’ 문화 확산으로 성장세가 본격화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주류 시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주를 마시는 주된 장소는 ‘집’(약 60%)으로, 5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전통주 전문가인 경기도농업기술원 이대형 농업연구사는 “독하지 않고 혼자서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데다 남들과 똑같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취향의 표현 방식으로도 활용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전통주 배달에, 구독 서비스까지

/그래픽=송윤혜

괄목할 만한 성장은 ‘온라인 판매’ 허용에 힘입은 바 크다. 2018년 정부의 시장 육성 차원이었다. 이듬해 ‘전통주 구독 서비스’를 표방한 판매 업체 ‘술담화’가 론칭됐다. 구독자의 취향과 음식·테마에 맞춰 3000여 종의 전통주를 큐레이션해 택배로 배송해주는 것이다. 매달 5만 병 정도가 구독 서비스를 통해 판매되는데, 20~30대 고객이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술담화’ 이재욱 대표는 “만취에서 음미로 음용의 문화가 바뀌면서 구독자 층도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식재료 배달업체 마켓컬리는 2021년 12월부터 전통주를 장바구니 목록에 포함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7월 SSG닷컴에 전통주 전문관을 열었다. 지난 설 명절에는 10세트 한정 1200만원짜리 전통주 선물 세트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고, 판매에 성공하기도 했다. 편의점 CU는 지난 3월 전통주 플랫폼 ‘대동여주도’와 손잡고 주류 특화 매장에서 판매를 개시했다. 업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젊어진 애주가, 젊어지는 양조인

전통주 제조 회사 '한강주조' 고성용 대표가 서울 성수동 양조장에서 서 있다. 30대 청년들로 구성된 회사를 2019년 차렸고 ‘나루생막걸리’를 출시해 대박을 터뜨렸다. /김지호 기자

인기와 함께 판매자도 증가세다. 국세청에 따르면 전통주 제조 면허는 2017년 943개에서 2021년 1401개로 늘었다. 여기서도 신세대는 돌풍의 진원이다. 30대 청년들이 2019년 창립한 ‘한강주조’가 그 대표 주자. 30대 여성층을 겨냥해 서울 쌀로 만든 첫 작품 ‘나루생막걸리’가 대박을 터뜨렸고, 2021년 정부 공인 ‘대한민국 우리 술 품평회’에서 최고의 탁주로 선정되며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술담화’ 창업자들은 올해 미국 경제지 포브스 선정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 음식·예술 분야에 이름을 올렸다. 2030세대를 타깃으로 충남 전통주 ‘한산소곡주’ 변주에 나선 전통주 개발 회사 ‘슬로커’는 이달 신제품 론칭과 함께 인기 래퍼·DJ를 동원한 여름 파티를 벌일 예정이다. “MZ 세대를 겨냥한 지역 주류가 K컬처의 새 주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양화·신진화가 업계 풍토를 바꿔놓고 있지만, 아직 전통주의 시장 비율은 1% 수준이기에 장기적인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보고서 ‘원소주 대박난 원인과 더 발전하려면’을 펴낸 강원연구원 측은 “소셜미디어 상에 자주 노출되는 제품에 일시적인 구매가 일어나는 현상이나 품질과 가격 경쟁력보다는 유행에 치우쳐 판매되는 경향도 보인다”면서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스타 브랜드 육성 정책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전통주 기준 논란… 아직도 헷갈려

미국식 사과 탄산주 '애플 사이더'. 외래 주종이지만 이 제품은 국내 농업회사법인이 100% 충주 지역 사과를 재료로 주조해 전통주(지역특산주)로 분류된다. /비전레드

문제 하나. ‘애플사이더’는 전통주일까 아닐까? 60년 전통의 스테디셀러 ‘장수생막걸리’는?

전통주는 크게 ‘지역특산주’ 와 ‘민속주’로 나뉜다. 지역특산주는 농·어업 경영체가 직접 생산하거나 지역 특산품을 원료로 삼은 술, 민속주는 무형문화재나 전통식품 명인이 제조한 술이다. 고로 미국식 와인 ‘애플사이더’도 농업법인이 지역 특산 과일로 주조하면 전통주(지역특산주)다. 그러나 수입 쌀을 주원료로 하는 ‘장수생막걸리’는 아무리 그 역사가 오래돼도 전통주가 아니다. 헷갈리는 건 또 있다. 와인은 과실주라는 이유로 지역특산주에 포함되지만, 맥주·위스키는 100% 국산 원료여도 제외된다. 모호하니 불만도 많다.

전통주는 주류세 50% 감면과 온라인 판매 허용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해 말 정부는 전통주법을 개정해 분류 체계를 손보기로 했다. ‘지역특산주’는 따로 카테고리를 만들어 전통주에서 분리하고, 장수생막걸리 등은 ‘일반 전통주’ 명목으로 전통주에 포함하되 대형 업체에 대한 견제를 위해 주류세 감면 등의 혜택은 부여하지 않는 절충안을 낸 것이다. 그러나 연내 처리를 약속했던 개정안은 답보 상태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수입 쌀로 빚은 술을 전통주로 인정해선 안 된다는 농가 및 정치권의 반발이 거센 데다 이해관계도 복잡해 현재 논의가 멈춰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