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20년 넘게 일했던 직장인 국립현대미술관을 그만두고 나왔다. 막상 퇴직하려니, 하고자 했으나 미처 다 못 한 일들이 아무래도 마음에 쓰였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린 것은 지난날 내가 경험이 너무 부족한 탓에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다. 2004년 ‘초짜’ 학예연구사로서, 극재 정점식(1917~2009)의 개인전을 준비한 일이 딱 그런 일이었다.
정점식은 1917년 태어났다. 이중섭보다 한 살 어리니까 이른바 ‘근대기’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중섭처럼 소를 그리거나 게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상과 감각과 신비를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도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보다 57세가 많은 노(老)화가는 나를 완전히 동등한 인격체이자 큐레이터로 대했다. 그는 철저히 화가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 큐레이터의 독자적 영역을 침범하는 법이 없었다. 전시는 온전히 나한테 맡겨 놓고, 개막식이 시작하는 시각에 딱 맞춰 전시장에 나타났다. 나중에야 나는 모든 원로 화가들이 이처럼 큐레이터를 존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에게 걸맞은 훌륭한 전시 기획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2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조금 더 보인다고는 말할 수 있다. 지금 더 잘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그의 작품에 흐르는 ‘비극성’이다. 그때는 그저 담담하게만 보였던 그의 작품을 이제 다시 보면, 거기에서는 그가 평생 결코 말하지 않았던 어떤 깊은 어둠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에게는 차마 말할 수도, 울 수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 그림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을 그런 세계가.
◇유랑 생활과 독학
정점식은 1917년 경상북도 성주의 평범한 유교 가정에서 장남이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 시절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울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남에게는 무거운 책임과 절제가 요구되는 사회였으니까. 그는 자신의 부모와 가족에 대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그림을 업으로 삼는 일을 집안에서 반대했기에 유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예닐곱 살 때 대구 약전골목에서 한약방을 하던 고모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이모가 살던 일본 교토에 가서 시립회화학교를 다녔다. 1941년 졸업 후 귀국했지만, 2차 대전의 혼란 속에서 다시 만주로 떠났다. 하얼빈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삼촌 집에 기숙하면서, 정점식은 조선인학교 교사로 일했다. 국제도시 하얼빈에서, 정점식은 넘치는 지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하얼빈은 40국에서 온 인구 120만이 살던 큰 도시였다. 정점식은 한국어·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영어를 할 줄 알았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전설적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폿킨의 저작에 심취했고, 엥겔스에서부터 프로이트·보들레르·발레리·아폴리네르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신의 지적 담론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전쟁과 비극
해방 직후인 1946년 그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간신히 대구로 돌아왔다. 해방 정국 혼란기에 물자를 구할 수 없어, 유화 물감을 직접 만들어서 튜브에 넣어 사용했다. 하얼빈에서 러시아인에게 배운 유화 물감 제조법이 도움이 되었지만, 만들 수 있는 색이 제한적이어서, 그의 1940년대 작품 화면은 유독 더 어두웠다. 물감을 담아둘 튜브를 따로 사기 위해 대구에서 새벽 기차로 서울 영등포에 갔는데, 바로 그날 6·25가 터졌다.
전쟁의 참상과 잔혹성, 인간적 공포와 무기력 같은 것을 어찌 다 구구절절 얘기할 수 있겠는가. 정점식은 그런 구차한 얘기를 하기 싫어한다. 신파는 딱 질색이다. 그는 시시하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말을 아끼고, 현실을 극복해서 더 나은 세계를 끊임없이 꿈꿔야 한다. 정점식의 높디높은 자존감과 이상(理想)은 눈앞의 참담한 현실과 너무나도 큰 괴리를 지녔다. 그의 친구 시인 박두진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53년 전쟁 통에 정점식이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박두진은 이렇게 썼다. “정점식씨의 개인전을 보러 공보원화랑엘 가서 걸려 있는 그림들과 그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문득 무언가 벅차오르며 눈물이 고여 올라 슬며시 나와 버렸다.”
얼핏 보면, 그의 작품에 담긴 ‘비극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진부한 감정의 찌꺼기를 거르고 걸러서, 예술이라는 높은 차원의 은유적 표현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1961년 작품 ‘카리아티드’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카리아티드(caryatid) 기둥 양식을 단순화해 그린 것 같지만, 그 배경에는 애절한 사연이 숨어 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전쟁 중 페르시아에 부역을 한 카리아 지방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로 삼았는데, 바로 이 고대 전설에서 카리아티드 건축 양식이 나왔다고 한다. 사내들이 저지른 전쟁 때문에, 카리아 여인들은 가족을 잃고 노예가 돼 영원히 무거운 지붕을 머리에 이고 풍설(風雪)을 견디는 형벌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은유를 한층 더 벗기면, 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국 또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오랫동안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는가. 정점식은 트라우마로 점철된 자신의 식민지 체험과 전쟁의 기억을 결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대신 그 경험을 훨씬 더 인류의 보편적 언어로 치환했고, 숭고한 희생의 이미지로 변환했다. 예술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러나 쉽게 알아볼 수 없는 형상에다, 은유에 은유를 더한 그의 작품 세계는 처음부터 세간의 이해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서울도 아니고, 대구라는 지역사회에서는 더 그랬을 것이다. 희끗희끗한 배경에 ‘성난 소’와 같은 빠른 선(線)이 지나간 작품을 보고, 한 동료가 “오늘은 곰탕거리를 그렸군” 하고 농담을 걸기도 했다. 곰탕거리도 안 되는 그런 그림을 왜 그렇게 그리고 앉았느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家長)인 데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몰이해가 팽배한 현실 앞에서, 정점식은 미술 도구를 갖다 버리길 세 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 번째로 미술 도구를 버리고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 나는 천생 화가인 모양이구나’라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고는 스스로 호(號)를 ‘극재(克哉)’라고 지었다. 이겨낼 ‘극(克)’에, 어조사 ‘재(哉)’를 쓴 특이한 호다. 어조사 ‘재’는 물음표로도 느낌표로도 해석되기에, 그의 호는 ‘이겨낼 수 있을까’와 ‘이겨낼 수 있다’ 두 가지 모두로 풀이된다. 정점식은 자신의 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화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직업이다. 예술가로서 더 나은 경지를 향한 전진은 천형(天刑)과 같다.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 예술가는 ‘이겨낸다’는 자기 확신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갈등 사이에서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원래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사소하고 소박한 것이 주는 행복감 같은 것이었다. 자연의 그늘, 숨결이나 향기 같은 것들 말이다. 봄바람이 살짝 얼굴을 스치는 느낌 같은 것을 그는 사랑했다. 감각이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했다. 그의 그림 중 그나마 잘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인 ‘봄’(1966)을 보면, 꽃나무 한 그루와 졸음에 겨운 검둥개가 등장한다. 그런데 관객은 이 작품에서 나무와 개를 보면서도, 결국은 봄볕의 아스라하고 포근한 느낌에 감동받는다. 바로 이 ‘느낌’이 더 중요한 주제다. 그렇다면 이 ‘느낌’ 자체를 그림으로 그리면 어떨까? ‘양지’(1985)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부서질 듯 화사한 화면 위에 명도 높은 빨강과 노랑, 이와 대비를 이루는 검은 그늘이 떠돈다. 어찌 보면 이런 추상 작품이 오히려 더 즉각적으로 사태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고 화가는 믿었다.
그의 작품은 말년으로 갈수록 확연히 자유로워졌다. 이전의 극도로 절제된 화면에서 벗어나, 좀 더 즉흥적이고 유연한 세계로 나아갔다. 살랑살랑 ‘미풍(微風)’이 불고 어두운 밤이 스스로 노래하는 그림들이다. 촉각과 청각을 간질이는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어법은 새롭고 현대적이지만, 결국 그가 추구한 것은 소담하고 푸근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었다. 이 소소한 것의 가치를 위해 화가는, 이겨낼 수 있다.
◇정점식의 유산
정점식은 1964년 대구 계명대학교에 처음 미술공예과가 설립될 때 적극 가담했고, 초대 교수가 됐다. “이런 바위산을 깎아 오늘을 마련했다”는 정점식이 쓴 문구가 지금도 학교 입구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그에게 교육자라는 직업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동년배들은 잘 알아주지 않아도 후배나 학생들은 좋아했다. 세계의 최신 지식을 구해다 공부해 학생들과 얘기하는 것을 그는 진심으로 즐겼다. 계명대에서 정점식의 강의는 명강으로 통했고, 1983년 퇴직할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패션디자이너 박동준은 그의 스승 정점식의 추상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멋진 옷을 만들었고, 무용가 김현옥은 정점식을 오마주한 안무를 짰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점식의 그림 ‘밤의 노래’를 공식 포스터 이미지로 썼다. 그의 작품은 훨씬 더 나중 세대의 예술가들과 호흡했다. 정점식은 작고하기 전 대부분의 작품을 계명대에 기증했고, 대구 앞산 아래 오래된 아파트에서 2009년 숨을 거뒀다. 끝없이 겸허하고 소박한 화가의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