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일석, 이리 와!”
잔디밭에서 신나게 뛰놀던 대박이와 일석이가 꼬리를 흔들며 하지홍(70) 한국삽살개재단 이사장에게 달려왔다. 흰색·갈색·검은색이 섞인 얼룩무늬 짧은 털로 온몸이 덮인 대박이와 일석이는 처음 본 기자를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으르렁대거나 짖지는 않았다. 다가와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주인과 사이 좋은 걸 확인하고는 이내 몸을 다리에 비비며 친근감을 표현했다. “성격이 밝고 명랑해요. 사람을 좋아해 멀리 안 가고 주위를 맴돌지요. 우리 토종 개 ‘바둑이’의 특징입니다.”
얼룩덜룩한 무늬가 검고 흰 바둑돌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바둑이는 개의 대명사였다. 그만큼 흔하고 친숙했다. 1945년 광복 후 처음 만들어진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바둑이 방울 잘도 울린다”로 시작하는 동요 ‘바둑이 방울’이 불렸을 정도다. 사라졌던 바둑이가 최근 복원됐다. 바둑이는 왜 사라졌고 어떻게 돌아왔을까. 바둑이들이 모여 사는 경북 경산 한국삽살개재단을 찾아갔다.
◇삽사리에게 태어난 털 짧은 얼룩무늬 새끼
바둑이의 귀환은 또 다른 토종 개 삽살개 덕분이다. 한국삽살개재단에서 40년 넘게 삽살개를 보존·연구해 온 하 이사장은 “삽살개 복원 과정에서 짧은 털과 얼룩무늬를 가진 새끼가 1% 미만 빈도로 태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개들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던 그는 조선시대 그림에 남겨진 개들의 모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그림과 문헌을 보고 이 얼룩무늬 개가 한동안 사라졌던 바둑이임을 알아냈다. 얼룩무늬는 물론 누운 귀, 풍성한 꼬리털, 큼직한 골격 등 옛 바둑이의 외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그림에 등장하는 개들은 대부분 털이 짧은 단모종이고 바둑이가 많아요. 특히 18세기 도화서 화원 김두량(1696~1763)이 그린 ‘견도(犬圖)’와 똑같았어요. 김두량은 궁정에 소속된 당대 최고 화가에 속했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 들어온 모본(模本)을 따라 그리는 이상화된 산수화가 아닌, 겸재 정선(1676~1759)이 주도한 진경산수와 단원 김홍도(1745~1806)·혜원 신윤복(1758~?)으로 대표되는 풍속화 등 사실적 화풍이 득세한 시기에 활동했죠. 당시 조선 토종 개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제가 확신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둑이 유전자가 어떻게 삽살개 안에 들어 있었을까. 하 이사장은 “삽살개 속에 짧은 털과 얼룩무늬를 가진 바둑이 유전자가 숨어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한국 토종 개는 모두 잡종이었어요. 계획적인 교배를 통한 혈통 고정, 순종, 품종 등 현대적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입니다. 삽살개, 바둑이란 이름은 있었지만 털 길이, 색깔 등이 특별한 개들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지 현대적 개념의 순혈 품종은 아니었어요. 그렇다 보니 복원된 삽살개 안에도 바둑이의 유전자가 남아 있었던 거예요.”
바둑이가 사라진 건 일제강점기다. 바둑이뿐 아니라 삽살개 등 한국 토종 개 대부분은 멸종 위기를 겪었다. 일제는 1938년부터 2차 대전으로 패망한 1945년까지 일본군이 전쟁 물자로 쓸 모피를 얻으려고 ‘조선원피주식회사’라는 별도 법인까지 만들어 한반도 토종 개 150만 마리 이상을 잡아 껍질을 벗겼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의 개와 그 모피’라는 3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에 자세히 나온다.
다행히도 진돗개와 풍산개는 멸종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일본은 ‘우리도 서양 사람들처럼 일본 품종의 개를 만들자’며 지역마다 토종 개를 지정해요. 1931년 아키타현(縣)의 아키타견을 시작으로 1937년까지 시바견·규슈견·홋카이도견 등 여섯 종류의 일본 토종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합니다. 1937년 경성제국대학 모리 다메조(森爲三) 교수가 전남 진도에서 쫑긋 솟은 귀, 뾰족한 주둥이 등 일본개와 닮은 진돗개를 발견하고 “(보존하면)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징표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합니다. 총독부가 이를 받아들여 1938년 진돗개를 조선의 천연기념물 제53호로, 1942년 함경도 풍산개도 천연기념물 128호로 각각 지정합니다.”
◇한국 토종개 기원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하 이사장은 한반도 대표 개였던 바둑이도 삽살개처럼 복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연 교배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건국대 줄기세포재생공학과 박찬규 교수에게 바둑이 복제를 의뢰했다.
박 교수는 2018년 바둑이 첫 복제에 성공했고, 이후 5년 뒤인 올해 6월 50마리 이상의 집단을 형성한 ‘집단 복원’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몇 마리 수준이 아닌, 품종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전적 형질이 완전히 고정된 집단이 처음으로 구축됐다는 뜻이다. 하 이사장은 “50마리는 돼야 좋은 놈들을 추려서 가계가 먼 놈들과 교배해 하나의 품종으로 일가(一家)를 이루는 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 연구팀은 한국 토종개의 기원을 밝히기도 했다. 연구팀은 삽살개·진돗개·동경이와 아시아·유럽 개, 고대(古代) 개, 늑대 등 갯과 동물 211마리의 게놈 염기서열을 비교 분석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는 약 1만5000년 전 늑대와 종이 분리됐다. 바둑이와 삽살개는 티베트 마스티프 같은 북방 중앙아시아 개들과 유전자가 비슷하다. 4700여 년 전 북방 유목 민족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진돗개와 동경이는 뉴기니 싱잉독, 호주 딩고, 베트남 토종 개 등 동남아 지역 개들과 혈통이 가깝다. 논농사를 짓던 사람들과 함께 2600년 전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하 이사장은 “조상들은 원하는 품종을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교배하지는 않았다”며 “북방과 남방 유전자가 자연스레 섞여 토종 개 집단을 형성했다”고 했다.
◇교감 잘하고 명랑… 동물매개치료 적합
올해 여섯 살인 대박이와 네 살인 일석이는 체고(어깨까지 높이) 60여cm에 체장(몸체 길이) 70여cm로, 진돗개보다 크고 중대형견으로 분류되는 골든 리트리버와 비슷한 당당한 체격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덩치가 크다고 하자, 하 이사장은 “외국에서 들어온 작은 얼룩무늬 개를 바둑이로 잘못 알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대박이와 일석이는 처음 본 기자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애정을 표현하며 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다. “온몸으로 강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개예요. 외출할 때는 주인 곁을 잘 떠나지 않아요. 지구력, 빠른 속도, 승부 근성, 민첩성 등을 두루 갖춘 진돗개만큼의 사냥개 기질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반려견으로서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죠.”
하 이사장은 “바둑이는 성격이 따뜻하고 교감을 잘해 동물 매개 치료견으로도 훌륭하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 중독 환자, 자폐 아동, 학교 폭력 피해·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동물 매개 치료를 대구 대동병원과 함께 20년 전부터 연 40회가량 진행하고 있다.
“바둑이는 외모·성품·능력 등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개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서울시나 수도권 지자체에서 바둑이를 문화자산이나 사회복지자산으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뜻이 있는 지자체가 나선다면 그동안 복원한 바둑이 50여 마리를 모두 넘겨드릴 의향도 있어요. 동물을 기르는 반려 인구가 1300만이 넘는 시대이니, 주민들에게도 호응 높은 사업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