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한 카페에 유리병이 놓여있다. ‘TIP BOX(팁 박스)’라고 쓰인 병, 그 안에 접힌 지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종업원을 위해 알아서 돈을 넣으라는 의미다. 지난달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사진을 게재한 네티즌은 “한국에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외국 문화”라며 “미국에서는 직원 시급을 법적으로 최저임금보다 적게 줘도 되는 이유로 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서는 왜 팁을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썼다. “누구 하나 시작하면 홍대 어딘가에서 유행할 것 같다” 같은 우려 섞인 댓글 300여 개가 잇따랐다.

이윽고 카카오택시가 불씨를 댕겼다. 지난달 19일부터 ‘감사 팁’ 제도를 시범 도입한 것이다. 호출한 택시로 목적지에 도착한 뒤 별점 5점을 선택하면 1000원부터 최대 2000원까지 팁을 줄 수 있도록 했다. ‘기사님께 감사 팁으로 마음을 전해보세요.’ 어디까지나 승객의 자율적인 선택 사항이고, 서비스 향상 독려를 위한 택시 기사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 돈으로 전하는 정(情), 그간 한국에 없던 미국식 팁 문화가 서서히 퍼져 나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팁으로 마음 전하라고요?

팁 결제 서비스를 시범 도입한 카카오택시. 카카오 측은 "일주일간 하루 평균 1900명 정도의 승객이 팁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태경 기자

호출용 택시 업계에서는 팁 결제 시스템이 일찌감치 선을 보였다. 2019년 ‘타다’가 가장 먼저 실시했고, 2021년 ‘아이엠택시’도 뒤를 이었다. 별점 5점을 줄 만큼 서비스에 만족하면 결제 창을 통해 팁 제공을 선택할 수 있다. ‘아이엠택시’를 운영하는 진모빌리티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이용객 중 팁을 결제한 비율은 7%에 불과했다. 평균 팁 액수는 3000원. 그러나 이제 국내 최대 규모의 플랫폼 카카오가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쟁점으로 비화하는 모양새다.

서울 안국동 및 부산의 유명 카페들도 속속 ‘팁 박스’를 설치하고 있다. 그러다 지난해 한 음식점이 입방아에 올랐다. 식탁마다 올려둔 안내문 때문이었다. ‘서빙 직원이 친절히 응대했다면 테이블당(팀당) 5000원 정도의 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부연 설명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지만 “불친절하게 응대하면 5000원 빼주나?” 같은 댓글에서 보이듯 대부분의 반응은 불쾌감이었다. “업주가 종업원 월급을 올려주는 대신 고객에게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팁플레이션’ 쇼크

미국 유튜버 올리버가 키오스크로 베이글을 주문하는 장면. 가격이 1.69달러지만 최소 팁이 1달러다. "물론 '노 팁' 버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베이글에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지 불안해서 억지로 팁을 내게 된다"고 말했다. /유튜브

팁 문화 도입에 대한 반감은 현재 ‘팁의 나라’ 미국이 팁으로 상당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이기 때문이다. 야금야금 오른 팁이 어느새 비용의 40%까지 치솟은 데다, 스타벅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서도 키오스크 화면에서 팁 결제를 선택할 수 있게 해놨다. 종업원의 서비스를 일절 받지 못했어도 눈치를 보느라 팁을 줘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유명 미국인 유튜버 올리버 샨 그랜튼이 최근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됐다. 미국 빵집에서 키오스크로 1.69달러짜리 베이글을 주문하자 팁을 내겠냐고 묻는 화면이 뜨는데, 최소 금액이 1달러였다. 팁 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팁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이유다.

미국은 식당 웨이터 등 서비스 업종의 연방 최저 시급이 2.13달러(약 2700원)로 낮아 손님의 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나 그런 미국에서조차 팁을 없애야 한다는 거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미국 금융 정보 제공 업체 뱅크레이트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성인 3명 중 2명(66%)이 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한 41%가 ‘업체가 팁에 의존하는 대신 직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호의 계속되면 권리 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국내 여론조사 플랫폼 더폴이 최근 시민 2만295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에서 ‘팁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1%가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 중 ‘매우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38%로 ‘매우 긍정적’(8.5%)보다 5배 가까이 높았다. 이 배경에는 호의로 시작된 팁 문화가 의무처럼 변질될 것이라는 전망이 자리하고 있다. ‘택시 팁’ 도입에 대해서도 “시범 도입되다가 결국 배달비처럼 고착될 것이 우려된다”고 응답한 비율이 57.4%였다.

물가 상승과 더불어 배달 팁·포장 팁 등 각종 서비스에 붙기 시작한 요금도 ‘팁 저항’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정규 요금에서 자꾸 플러스 알파가 붙는 상황이 계속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부담일 수밖에 없다”며 “이 관습이 국내에 적용되는 게 맞는지 들여다보는 소비자 단체 등의 움직임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