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지금 나한테 이거 던진 놈 누구야?”

정문고등학교의 대장인 종훈(이종혁)은 똘마니들을 이끌고 현수(권상우)의 반에 난입한다. 평소 종훈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학생이 학교 공터에 있던 종훈에게 먹던 우유를 던졌는데, 그 학생이 하필 현수네 반이라서 그랬다. 현수네 학급 ‘짱’은 햄버거(박효준).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종훈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할 수 없이 그가 나선다. “야야, 우리 반 아니야. 나가서 이야기하자.” 심지어 이런 말도 한다. “내 가오 좀 살려주라, 응?”

하지만 화가 난 종훈은 햄버거 따위가 끼어드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에, 햄버거는 종훈에게 먼지 나게 맞는다. 교실 뒤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현수는 가방에서 쌍절곤을 꺼내 주머니에 넣은 뒤 도시락 통을 종훈에게 던진다.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종훈네 패거리에게 현수는 일갈한다.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그 뒤 펼쳐지는 장면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전설로 만들어준 옥상 신. 태권도 사범의 아들이자 그날의 싸움을 위해 맹훈련한 현수가 종훈 패거리를 물리치는 건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명장면이지만, 난 주인공 현수보다 교실에서 먼지 나게 맞던 햄버거에게 관심이 갔다. 햄버거는 싸움을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종훈과 맞먹는 싸움 실력을 지닌 우식(이정진)이 그 반 대장이었고, 햄버거는 우식의 비위를 맞추며 반 애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식이 종훈에게 진 뒤 학교를 떠난 탓에, 햄버거는 얼떨결에 학급 대장이 됐다. 종훈이 범인을 찾는답시고 반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릴 때, 햄버거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경우 반의 대장으로서 위신이 안 서기에, 얻어맞을 줄 알면서도 앞으로 나선 것이다. 종훈에게 맞으면서 “잘못했어” “한 번만 봐줘”라며 우는소리를 한 건 그 대가였다.

정권 교체가 좋은 점은 과거 정권 때 잘못한 일들이 밝혀진다는 것. 그중 하나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유엔사 무력화 작전이다. 유엔사는 한국에서 6·25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950년 7월, 일본 도쿄에 만들어졌고, 1957년 7월 용산으로 옮겨온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평상시 정전협정 체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유엔사의 진가는 전시에 드러난다. 알다시피 유엔군 파견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중 하나라도 반대하면 불가능하다. 1950년 우리나라에 유엔군 파견이 가능했던 것은 소련이 회의에 불참했고, 중국은 지금의 대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유엔군이 파견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니 북한의 침략이 있을 때 일본에 기지를 둔 유엔사 참여국들이 한미연합사에 병력과 장비를 지원해 준다면,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한동안 유명무실했던 유엔사를 재활성화하려는 건 이런 취지건만, 문재인 정권은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2019년 외교 안보 특보 문정인이 “(유엔사는)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 한 바 있고, 송영길 외교통상위원장은 “유엔사가 남북 관계에 간섭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유엔 대표부 김일철 서기관이 2018년 10월 유엔에서 "유엔사는 괴물 같은 조직"이라며 해체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더 황당한 일은 다음이다. 원래 유엔사는 6·25 참전국이 주축이 된 17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핵 위기가 심각해진 2020년 초, 6·25 당시 한국에 의료 지원을 한 덴마크가 유엔사 참여를 요청한다. 한국 정부로선 당연히 환영할 줄 알았던 이 요청은 문 정권에 거부당한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던 덴마크는 “그 방침이 맞는지 재확인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국방부와 외교부 모두 그게 사실임을 확인해줬다. 이를 포함해 덴마크는 17차례나 재검토 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는데, 덴마크가 유엔 전력 제공국이 된 것은 정권이 교체된 뒤였다. 미국이 가입시키려 했던 독일도 한국과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국방부는 주한 독일 대사관 무관을 초치했다. 심지어 “한국군도 유엔사 참모부에 들어와 달라”는 미국의 요청마저 거부했다니, 기가 막힌다. 오죽했으면 한 유엔사 관계자가 “전쟁에 직면한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제안을 거절한 것과 같다”고 했을까.

유엔사 무력화에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면 그 얘기를 해주면 된다. 하지만 전 정권 누구도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 같은 좌파 언론은 “유엔사가 남북 관계에 번번이 ‘딴죽’을 걸었다”고 하지만, 남북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한반도 평화고, 지난 70년간 이게 가능했던 일등 공신은 한미 동맹과 유엔사 아닌가? 바꿔 말하면 유엔사 해체를 가장 바라는 세력은 북한일 터,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문 정권의 유엔사 무력화 기도를 이 지점에서 찾는다. 예컨대 2018년 10월, 김인철 유엔 북 대표부 서기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 있는 유엔사는 괴물 같은 조직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해체돼야 합니다.” 유엔 주재 북한 대사 김성은 2021년 10월과 2022년 2월 유엔사 해체를 주장했고, 그 전엔 리용호 전 외무상도 같은 얘기를 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유엔사 재활성화에 반대하고, 유엔사 해체로 이어질 종전 선언을 주장하는 건 북한으로선 굉장히 고마워할 일이었으리라.

그런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난 ‘말죽거리 잔혹사’의 햄버거를 떠올렸다. 평소 북한의 비위를 맞추며 한반도 문제에 그 나름의 역할을 하려 했지만, 정작 북한에서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한 게 햄버거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비핵화를 한다는 김정은의 말에 속아놓고선 제대로 항의 한번 못 한 것도 억울한데, 삶은 소대가리라는 조롱에,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당하는 수모까지 겪지 않았는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 나오는 “우리는 남쪽의 바보들을 약간 놀라게 했고 이는 퍽 재밌었다”는 대목은 대통령 본인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모욕이었다. 먼지 나게 맞긴 했지만, ‘말죽거리 잔혹사’의 햄버거가 종훈을 제지하려 한 것은 위기에 몰린 자기 반 학생들을 지키려 함이었다. 반면 문 전 대통령은 핵을 개발한 북한을 응징하는 대신, ‘종전 선언’을 줄기차게 주장함으로써 북한의 이익을 대변해줬다.

퇴임 후 양산에서 SNS에 몰두하고 있는 그분께 한 말씀 드린다. 문 전 대통령님, 현수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햄버거 정도의 역할은 해주셨어야죠. 그래 놓고도 반성은커녕 계속 자화자찬만 해대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