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은 초록의 향연이다. 판교역을 출발한 지하철은 경기도 동부의 깊은 골과 너른 들의 녹음을 번갈아 가르며 49분을 달려 종착역인 여주역에 도착한다. 판교와 여주를 잇는 지하철이 경강선인 까닭은 경기도 시흥시 월곶역에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릉역을 잇게 될 긴 노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미완의 경강선은 광주, 이천, 여주까지 우리나라 최대 도자 도시들을 잇는 ‘도자 라인’이기도 하다. 여주역에서 멀지 않은 ‘티하우스 서하’는 여러모로 특별한 공간이다.
사방은 온통 산과 들인 티하우스 주변에도 초록의 향연이 한창이다. 입구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마당에는 잔디가 푸르다. 뒤편 울창한 수국 너머로는 고구마 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티하우스에 들어서면 깊은 숲 한가운데 아늑하게 들어앉은 기분이 든다. 건물 안까지 들이닥치는 초록의 물결을 눈으로 맞고 잔잔한 피아노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찻잔을 음미하는 것만으로 일상의 번뇌들이 한 걸음 물러난다. “첫 잔은 입술과 목을 축이고, 둘째 잔은 외로움과 번민을 씻어주네”(칠완다가·七碗茶歌)라고 노래한 옛 시인의 시구대로다. 하지만 공간이 주는 매력뿐이라면 이렇게 먼 길을 나설 필요는 없다.
서하에는 차와 다과가 두루 갖추어져 있다. 비발효차인 녹차(보성녹차, 하동녹차, 순천야생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수선, 자닮황차, 황룡차), 발효차인 홍차(정산소정, 기문, 운남)가 있고, 후발효차인 보이차도 세 종류다. 하나같이 고유의 풍미가 있는 명차들이다. 금귤차, 청귤에이드, 오미자에이드 같은 수제 음료와 밀크티, 핸드드립 커피도 수준급이다. 금귤정과, 다식, 호두강정, 곶감단지, 개성주악으로 구성된 다과상 주문도 잊지 않는다. 입안 가득 진한 시트러스 향이 감도는 금귤정과가 특히 좋다.
서하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다기다. 참외 모양 다관을 비롯해 서하의 모든 청자는 도자 공방 하빈요에서 도예가 이명균씨가 직접 흙을 빚고 물레를 차서 만든다. 너른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서하와 이웃한 곳에 하빈요와 살림집이 있다. 아들 이흘기씨도 어엿한 도예가로 성장했다. 물레 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이다. 이름에 담은 아버지의 소망이 실현된 셈이다. 이렇게 티하우스 서하는 아버지가 만든 다기로 가족들이 차를 끓여 내는 가족 기업이다.
우리 식당에는 플라스틱 식기가 적지 않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들마저 찬 음료는 플라스틱 컵에 담는다. 멜라민 식기에는 장점이 많다. 가볍고 델 염려가 없으며 함부로 다뤄도 깨지는 일이 없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지만 그릇은 음식의 맛에도 인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대 커피 소비국 가운데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차는 주변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차 성분이 전혀 없는 보리차, 옥수수차 같은 ‘유사 차’가 차의 자리를 위협할 지경이다. 하지만 차는 학명이 ‘Thea sinensis L’인 나무의 잎을 우려내 마시는 음료이다. ‘Thea’는 ‘차’를, ‘sinensis’는 원산지인 중국을, ‘L’은 스웨덴의 생물학자 린네를 각각 의미한다.
신라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차 문화는 선불교와 함께 고려시대에 화려한 꽃을 피운다. 다점(茶店)이나 다정(茶亭)이라고 불리는 찻집이 성업한 것도 고려이다. 조선 이후 차 문화는 빠르게 쇠퇴하였고, 여태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다방이라는 이름에는 낭만과 퇴폐의 기억이 동시에 담겨 있다. 전통찻집이라는 이름을 고집하기도 카페라는 이름을 빌려 쓰기도 어렵다. 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차 전문점들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