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오릉순메밀막국수의 물막국수(왼쪽)와 들비(들기름비빔)막국수.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고양시 서오릉은 옛 조선왕조의 다섯 능이 모여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옛 무덤터가 그렇듯 사방이 차분하고 아늑했다. 길가에 ‘서오릉순메밀막국수’라는 집이 보였다. 이층 단독건물에 자리한 이 집은 이른 점심 시간에도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바빠 보였다. 여유롭게 경치를 즐길 틈이 없었다. 부리나케 가게로 들어가니 “마지막 남은 자리입니다”라고 안내했다. “운이 좋네요”라고 말을 받은 뒤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좁은 계단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안내를 맡은 종업원은 공손했고 다른 이들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테이블 역시 잡티 하나 없었다. 이런 집은 음식이 쉽게 엇나가지 않는다. 주문을 넣으면 그때그때 면을 뽑는다는 설명이 벽에 붙어 있었다.

이제 서울 어디를 가더라도 막국수 집을 볼 수 있다. 족발집에서 서비스로 주는 그런 제품 막국수를 제외한다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직접 면을 뽑아 내놓는 본격적인 막국수는 강원도나 혹은 강원도에 접한 경기도 일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을 20여 년 전 몸으로 직접 느꼈다. 홍천과 속초는 44번 국도와 31번, 그리고 46번 국도로 이어져 있다. 대학생 때 떠난 도보여행 코스가 바로 그 길이었다. 100㎞가 조금 넘는 도보 여행 속 무수히 마주친 식당 중 둘째는 닭백숙집, 셋째는 청국장집이었다. 그리고 첫째가 바로 막국수 집이었다. 홍천에서도, 소양강 너머 인제에도, 설악산 기슭에도, 속초 앞바다에도 막국수 집이 있었다. 막국수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랐다. 애초에 막국수는 이름 그대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대충 비벼 먹는 국수였다.

강원도 정선에 아직 남아 있는 콧등치기국수는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칼국수처럼 면을 밀어 먹는 콧등치기국수는 메밀 특유의 물성 때문에 툭툭 끊겨 젓가락질을 하기 힘들 정도다. 가정집에서 메밀면에 신김치와 동치미육수, 고춧가루 양념 등을 해서 먹던 막국수는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으로 가면 가자미식해와 같은 해산물이 고명으로 올라가게 된다. 눈을 뜨면 걷고 또 막국수를 먹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귀에서 윙윙 이명이 들릴 때쯤 비를 맞으며 설악산을 넘었고 마침내 속초 앞바다에 도착했다.

지역 향토 음식이던 막국수가 전국구로 뻗어나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평양냉면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집들이 여럿 생겼고 더불어 질도 상향 평준화 됐다. 외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오른 덕이 크다. 그날 찾은 ‘서오릉순메밀막국수’는 전분을 섞지 않고 순수 메밀로만 면을 뽑았다. 비빔과 물 이외에 들기름, 들비 등 막국수 종류도 다양했다. 주문을 넣으니 면 삶은 물인 면수를 먼저 냈다. 이북 평양냉면집과 일본 메밀국수 집에서 보던 모습이었다. 메밀의 서늘하면서도 구수한 향이 몸 깊숙이 차올랐다.

잠시 후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고명은 잡지 사진처럼 가지런했고 똬리 튼 면의 자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비빔막국수는 양념이 과하거나 질척거리지 않았다. 오해가 많은 음식이 바로 비빔막국수다. 양념장을 맵고 강하게 만들어 다른 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편견은 이 집에서는 옛날이야기였다. 무채색에 가까운 메밀 맛에 다채로운 색감을 불어넣어 결이 풍부했다. 들기름과 비빔을 섞은 들비막국수는 고소하고 향긋한 들기름에 비빔 특유의 악센트를 섞었다. 참기름과 달리 거칠고 서늘한 향이 숨은 들기름은 산에서 자란 메밀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들기름 막국수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겼는데 이 집은 거기에 막국수 양념장을 더해 모자란 구석이 하나 없게 만들었다. 한우 육수를 우려 동치미 국물과 섞어 낸 물막국수는 이제껏 맛본 것과 다른 차원에 있었다. 냉면처럼 고기 육수로 국물을 내면 막국수란 토속 음식에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동치미 국물만 넣게 되면 향이 강하지 않은 메밀이 동치미의 산미에 가려지기 쉽다.

이 집 물막국수는 바이올린도 콘트라베이스도 아닌 그 사이, 첼로와 같이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심지가 단단한 균형을 이뤘다. 그 맛에는 멀리 강원도 계곡의 냉기와 그 산자락에 핀 메밀꽃의 숨막히는 정취가 비밀스럽게 얽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몸에 냉기가 서려 더운 바람도 무섭지 않았다. 눈을 들어 보니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둥그런 산등성이가 잔잔한 물결을 만들었다. 순간 그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방금 전까지 악산(嶽山)의 거친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은밀한 그늘이 사방에 깔린 강원도 산골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하얀 메밀 꽃이 피고 흙을 닮은 순박한 사람들이 바람을 벗삼아 살던 곳. 막국수의 맛이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서오릉순메밀막국수: 막국수(비빔, 물, 들비, 들기름) 1만2000원, 이북식만두 6000원, (02)-355-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