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중고나라’ 회사 로비에는 웬 붉은 벽돌 하나가 전시돼 있다. 네이버카페에 ‘중고나라’가 막 개설된 2003년, 누군가 이곳에서 중고로 핸드폰을 샀는데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벽돌만 들어 있었다는 전설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자성의 의미다. 개인끼리 물건을 사고파는 온라인 장터가 막 태동한 시점이었다. 벽돌 옆 설명문을 살펴보자. “바야흐로 2003년, 중고나라의 전쟁은 이 벽돌 하나로부터 시작됐다... 이슈가 되면서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 타이틀을 안고 중고나라는 최대 규모 중고 거래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중고 거래 시장의 신호탄, 불안한 마음으로 네티즌끼리 연락처를 주고받던 이 중개소는 점차 제도화되며 빠르게 성장했다. 10년 만에 회원 1000만명을 넘겼다. 2014년 법인화가 진행됐고, 2021년에는 롯데쇼핑이 300억원을 투자해 지분 93.9%를 공동 인수했다. ‘번개장터’ ‘헬로마켓’ ‘당근마켓’ 등 후발 주자가 경쟁하며 중고 시장 확장의 새 전기가 열렸다. KB증권에 따르면, 2008년 4조원 수준이던 중고 시장 거래 규모는 올해 30조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된다.
◇산삼부터 지게차까지… 없는 게 없다
꼭 사야 하는데 구할 길 없을 때 이 ‘나라’로 향한다. 조선 시대 엽전 등 문화재급 골동품, 산에서 캔 자연산 산삼, 트랙터·덤프트럭·지게차…. 장르 불문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중고 장터의 특장점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가 꾼 길몽(吉夢)을 1만원에 판다는 게시 글도 올라올 정도. 중고나라에는 물품이 1초에 1.7개 등록된다. 가수 김재중, 배우 박보영 등 ‘중고 거래 고수’를 자처하는 유명 연예인도 많다.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중고나라에서 일본 브랜드 바지를 구매한 사실이 판매자의 폭로(?)로 알려지기도 했다.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점유하는 건 패션 의류. 중고 플랫폼 ‘번개장터’가 지난 2월 발표한 ‘미래 중고 패션 트랜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용자의 78%가 MZ세대였다. 번개장터 측은 “중고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 합리적 소비의 관점으로 중고 패션을 애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고가 명품 부문에서도 다른 세대 대비 중고 거래 경험이 2배 이상 높았다”고 밝혔다. 빈티지에 대한 가치 소비 성향이 커지면서 ‘크림’ ‘솔드아웃’ 등 한정판 희귀 제품을 웃돈 붙여 파는 리셀(resell) 플랫폼도 자리를 잡았다. 이는 국제적 현상이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세계 중고 의류 시장이 2025년 무렵에는 약 10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중고 거래 일상화, 문화가 되다
중고 거래가 경제적으로 궁색한 행위로 비치던 때가 있었다. 회사원 한모(36)씨는 “과거엔 중고를 산다고 대놓고 밝히기 민망했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이제는 당연한 생활의 일부로 인식된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심리적 장벽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환전 수수료를 아끼려 외화(外貨)까지 직거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비자 조사 기업 컨슈머인사이트가 지난해 357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60%가 온라인 중고 거래 경험이 있었다. 30대는 71%였다. 얼마 전 중고 플랫폼을 통해 승용차를 산 손모(38)씨는 “워낙 중고 거래에 익숙한 데다 값도 저렴해 큰 고민이 없었다”고 말했다.
2015년 ‘당근마켓’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거래의 범위를 전국 단위에서 ‘우리 동네’로 좁혀 더 촘촘한 연결망을 형성한 것이다. 정(情)적인 공간 구실도 하고 있다. ‘무료 나눔’ 기능 덕이다. 2018년 38만147건이던 당근마켓 무료 나눔은 지난해 786만798건으로 20배 가까이 증가했다. 코로나 대위기 당시 회사에서 받은 마스크를 건네거나, 나라에서 받은 ‘나랏미’(米)를 공짜로 나누려 한 기초생활수급자 등의 미담이 많다. 중고에는 사람의 지문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중고 거래 중에 피어난 사랑, 2021년 웹 드라마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가 나온 이유일 것이다.
◇기업들 팔 걷었다… 유료화 실험도
네이버는 지난해 북미 최대 중고 패션 거래 플랫폼 ‘포시마크’를 약 2조원에 인수했다. 네이버의 역대 가장 큰 인수 금액. 과잉 투자 우려가 나왔지만 올해 1분기 흑자로 전환했다. 신세계그룹 벤처캐피털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번개장터’에 투자했다. 중고 거래가 대세가 되자 대기업도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구 업계도 리셀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케아는 중고 이케아 가구를 매입해 수리한 뒤 재판매하는 ‘바이백 서비스’를 운영하고, 현대리바트는 중고 가구 거래 플랫폼 ‘오구가구’를 지난 3월 출범시켰다. 알뜰 소비를 겨냥해 불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이다.
정작 중고 플랫폼은 적자다. 거래 수수료 없이 기업 광고료가 수입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 수익 모델은 뚜렷하지 않은 반면 고정비 지출은 크다. 업계 1위로 올라선 당근마켓은 지난해 매출 499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보다 94.3% 성장했지만, 영업 손실 역시 90억원 가까이 늘었다. 중고나라 영업 손실은 95억원으로 전년 대비 8배. 서비스 유료화 논의가 시작된 이유다. 당근마켓은 최근 광고비 3000원을 내면 관심 있을 이용자에게 우선 노출해주는 ‘24시간 이웃 광고’를 도입했다. 제주도에서만 시범 운영 중으로, 성공 여부에 따라 향후 업계의 새 척도가 될 전망이다.
◇사기꾼 소굴? 정부도 나섰다
코미디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은 노트북 중고 거래 사기로 돈을 날린 주인공이 범인을 잡으러 중국으로 떠나는 복수극이다. 실제 감독(백승기)이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을 토대로 제작했다. 지난달에는 아이패드 등의 전자제품을 판다며 8000만원이나 되는 돈을 받아놓고 잠적한 20대가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사기는 중고 거래와 뗄 수 없는 오래된 키워드다. 고장 여부를 확인하려 밥솥 직거래 당시 판매자 앞에서 직접 쌀로 밥을 지어봤다는 후기는 그런 사정에 연유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고 직거래 사기는 8만4107건, 피해액만 2573억원이다.
중고 사기가 전 국민적 사안이 되면서 판매자의 사기 이력을 조회할 수 있게 하거나, 구매자가 물건을 확인하면 플랫폼이 판매자에게 대금을 전송하는 안전 결제 시스템 등이 마련됐다. 그러나 사기는 더 교묘해지고 있다. 지난 6월 한국소비자원·공정거래위원회는 중고 플랫폼 4사와 협약을 체결해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운영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샀는데 수령 3일 이내에 중대 하자가 드러난 경우, 수리비 배상이나 전액 환불을 판매자에게 권고하는 식이다. 공정위 측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온라인 중고 시장이 더 신뢰 높은 시장이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부디 오늘도 평화롭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