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을 쓰니 훨씬 덜 더웠다. 장화를 신으니 갑자기 비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었다. 반바지는 밖에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회사에 들어가니 모두의 눈길이 쏠려 불편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경비 아저씨가 출근하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출입증을 찍고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호기심 어린 시선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경비 아저씨가 평소와 달리 나를 주목한 건, 내가 반바지에 장화 차림으로 출근했기 때문이다. 건물에 들어오기 전 접어서 가방에 넣은 양산까지 봤더라면 더 놀랐으리라.

양산과 장화, 반바지는 그동안 대한민국 성인 남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3년 여름을 강타한 극한 기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폭염과 폭우가 교차하는 변덕스러운 이상 기후가 계속되면서 한국 남성들이 그동안 터부시되던 양산을 들고, 장화를 신고, 반바지를 입고 일터로 가기 시작했다. 패션업체와 유통업체에서 양산·장화·반바지 남성 매출이 크게 올랐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주말이나 휴가 때는 어렵지 않겠지만, 평일에도 남자들이 반바지·장화 차림에 양산을 들고 거리낌 없이 출근할 수 있을까. 반바지·장화·양산 3종 세트를 모두 착용하고 일주일간 출근한 기록이다.

◇장화는 난이도 下·양산은 中

반바지·장화·양산 중에 ‘난이도’가 가장 낮은, 사용하기에 가장 덜 쑥스러운 품목을 꼽으라면 단연 장화(레인부츠)였다. 여성들에겐 오래전부터 인기 패션 아이템인 레인부츠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LF몰에 따르면 지난 6월 ‘남성 레인부츠’ 키워드 검색량은 전년 대비 57배, 전달 대비 60% 신장했다. 영국 패션 브랜드 바버는 레인부츠에 대한 남성 고객 수요를 반영해 지난달부터 남성용 레인부츠를 국내에 새롭게 선보였다.

장화를 구매하려고 검색해 보니 무릎까지 오는 ‘롱’부터 정강이까지 오는 중간 길이 ‘쇼트’, 발목 라인까지 떨어지는 ‘첼시’, 남녀 공용으로 착용할 수 있는 나막신 모양의 ‘클로그’까지 스타일이 다양했다. 롱 레인부츠는 눈에 띄어 신고 다니기에 부담스럽지만, 쇼트나 첼시는 등산화와 비슷한 길이라 크게 튀지 않았다. 클로그는 편하지만 자칫 슬리퍼로 보일 수 있어 회사에 신고 가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무난한 검은색에 발목이 넓어 벗고 신기 편한 쇼트 길이의 장화를 구입했다. 월요일에는 일기 예보와 달리 비가 내리지 않았다. 고무 재질로 공기가 통하지 않아 금세 발이 불쾌할 정도로 눅눅해졌다. 하지만 수요일 오후 갑자기 광화문에 비가 쏟아졌지만 장화를 신으니 발이 전혀 젖지 않고 뽀송뽀송 쾌적했다. ‘이 맛에 장화를 신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장화가 ‘난이도 하’였다면 양산은 ‘난이도 중’이었다. 양산은 따가운 뙤약볕을 피하려는 40~50대 이상 중장년 여성들이 주로 쓴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올여름에는 젊은 남성들도 들고 있다. G마켓에 따르면, 지난 7월 남성의 양산 구매 증가율이 12%로 여성(5%)보다 높았다. 연령대별로는 30~40대 양산 구매가 지난해보다 11% 증가했다. 11번가에서는 남성의 양산 카테고리 거래액이 1년 새 19% 늘어났다.

월요일 오후 3시 뙤약볕이 쏟아지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기온을 측정해보니 33도였다. 양산을 펼치고 그늘 온도를 재보니 31도였다. 실제 온도 차이는 단 2도지만, 체감온도 차이는 훨씬 더 컸다. 그늘 안팎 온도 차는 2~4도지만, 체감온도는 7도에서 10도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환경성이 공개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기온 섭씨 30도, 습도 50%로 설정한 상태에서 양산을 쓰고 15분 보행하면 모자만 착용했을 때에 비해 땀 발생량이 17% 감소했다. 피부암 등 피부질환과 탈모 예방에도 효과가 있었다. 눈부심도 훨씬 덜했다.

이처럼 양산을 써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평생 처음 양산을 펼쳐 들려니 왠지 쑥스러웠다. ‘양산은 여성의 전유물’이란 고정관념이 내게도 있었다. 일본에서 일했던 한 직장 동료는 회사를 나서자마자 거침 없이 양산을 폈다. 그는 “일본에서는 2019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남자도 양산을 쓰자’는 캠페인을 펼쳤다”며 “덕분에 ‘남자가 양산을 쓰면 이상하다’는 인식이 크게 줄었는지, 많은 일본 남성이 거리낌 없이 양산을 쓴다”고 했다.

광화문에서 종로 방향으로 걷다 보니 양산을 쓴 중장년 남성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스스로 지나치게 의식했지 않았나 자책하며 양산을 펼쳐 들었다. 국내에서도 뜨거운 날씨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란 별명까지 얻은 대구를 포함한 국내 지자체들도 양산 대여소를 운영하며 남성용 양산을 구비해두고 있다.

◇반바지 출근 여전히 눈치 보여

착용하기 가장 어려운 ‘난이도 상’ 아이템은 반바지였다. 출근길 버스·지하철과 거리 등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일단 회사에 들어서자 모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직장 동료·상사 등 거의 모든 남자가 한마디씩 했다. “시원해 보인다”는 덕담 수준이고, “다리가 튼실하네”부터 “너한테 어울리는 것 같으냐”는 언어 폭력 수준의 말을 들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지난달 12일 대한항공 사내 게시판에는 ‘반바지 입는 걸로 눈치 주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더워서 반바지 입고 출근했더니, ‘저건 좀 아니지 않냐’고 뒤에서 말했다는 걸 들었다”며 “복장 자율화라면서 눈치 보며 고민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논란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반바지 입고 출근하는 건 직원의 개인 의사다. 누구도 뭐라 하면 안 된다”라고 댓글을 달면서 일단락됐다.

이처럼 많은 기업에서 남자 직원들의 반바지 출근은 쉽지 않다. 대기업 복장 자율화는 2016년 삼성전자가 남성 직원들의 반바지 출근을 허용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2018년 LG전자, 2019년 현대자동차가 동참했다. 기업들은 수평적 소통 문화의 사례로 홍보했다. 하지만 허용해도 보수적 기업문화 때문에 실제로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한 대기업 직원은 “같은 회사라도 부·팀별로 다르다”며 “부장이나 팀장 등 윗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반바지를 자유롭게 착용할 수도, 눈치 보여 입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남성은 늘어나는 추세다. 온라인 패션 커머스 플랫폼 무신사가 지난 6~7월 검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남성용 반바지 검색량이 지난해 동기보다 40% 늘었다. 남성용 반바지 중에서 짧은 스타일보다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버뮤다 팬츠’ 스타일 반바지 선호도가 높았다. 비즈니스 룩으로 무난한 반바지를 찾는 고객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데님 버뮤다 팬츠’ 검색량은 120% 이상 치솟으며 관심이 높았다. LF몰에서도 지난 7월 ‘남자 반바지’ 검색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배 늘었고, ‘버뮤다 팬츠’ 검색량도 약 60% 증가했다.

‘한국신사’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패션 컨설턴트·칼럼니스트 이헌(49)씨는 “버뮤다 팬츠는 태생적으로 직장인 남성에게 가장 어울리는 반바지”라고 추천했다. “1914년 카리브해 버뮤다 섬 카페 주인 너새니얼 콕슨(Coxon)이 무더위에 힘들어하는 종업원들에게 긴 바지 대신 반바지 유니폼을 입혔죠. 이것이 버뮤다 팬츠의 시초입니다. 당시엔 반바지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고 양복 저고리에 넥타이까지 맸지요. 이를 본 버뮤다 주둔 영국 육군은 반바지를 정식 군복으로 병사들에게 입게 했고, 이후 전 세계 영국 군대에서 채택했죠. 홍콩이나 인도 등 과거 영국 식민지 지역 군인·경찰이 지금도 반바지를 착용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신사’가 알려주는 반바지·장화·양산 착용 팁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반바지에는 칼라(깃) 달린 셔츠를 권한다. 셔츠는 끝을 반바지 안으로 집어넣어 입고 벨트를 맨다.

통기가 잘되는 리넨 소재 재킷이나 얇은 카디건을 사무실 옷걸이나 의자에 뒀다가 출근해 걸치면 어지간한 양복 차림보다 격식 있어 보인다. 재킷과 카디건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시원하다 못해 추운 사무실에서 냉방병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양산은 자외선(UV) 차단지수를 확인한다. UV 90% 이상 양산을 선택한다. 바깥쪽은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 계열, 안쪽은 땅에서 반사된 햇빛을 흡수하도록 검은색 계열로 된 양산이 이상적이다. 대부분 자외선 차단 코팅 처리가 돼 있지만, 홑겹보다 이중지 양산이 더 효과적으로 막는다.

빛뿐 아니라 열까지 차단하는 암막(차광) 양산이 훨씬 시원하고 눈부심도 덜하다. 검은색 우산도 양산만큼은 아니나 어느 정도 자외선 차단 효과가 있다. 첼시 부츠 스타일 장화는 겨울철 눈이 많이 내렸을 때 신기에도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