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서울 성동구 지춘희 디자이너의 사무실 흰 벽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배우 이나영은 갑자기 선인장 앞으로 달려갔다. 책장에 털썩 앉아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여긴 어때요?”라고 물었다. 대답은 필요없었다. 사진 기자는 셔터를 쉬지 않고 눌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79년생, 172.5㎝, 압도적으로 작은 얼굴, ‘아는 여자’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모범 납세자, 강원도 정선 밀밭에서 작은 결혼식, 남편은 배우 원빈.

이나영의 프로필이다. 구설 한 번 없었고 소셜미디어(SNS)도 안 하며 여전히 신비로운 이 여배우가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로 돌아왔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이후 4년 만이다. 웨이브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는 고교 국어 교사 박하경(이나영)이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토요일에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을 따라간다. 해남, 군산, 부산, 대전, 속초, 제주. “박하경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는 후기가 많다.

지난달 13일 디자이너 지춘희의 사무실에서 이나영을 만났다. 1998년 봄 압구정동 영어학원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픽업돼 광고 모델로 출발한 배우. 데뷔한 지 25년이다. 사진 촬영 후 화장을 지우자 눈가에 자연스러운 잔주름이 보였다. 매니저가 생수병에 빨대를 꽂아 건네자 이나영은 “나 이거 마실래요”라며 옆에 있던 종이팩 물통을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듣던 대로 털털했다.

“박하경은 저랑 정말 닮은 사람이에요. ‘드라마를 보고 위로받았다’는 말들이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요. 제 감정과 연기가 잘 전달된 것 같아서. 기차 타고 가면서 자는 장면에서는 진짜 제가 입 벌리고 자는 모습을 쓰셨더라고요(웃음). 연기를 하면서 저도 박하경한테 위로를 받았어요.”

◇나는 아날로그 배우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 스틸

‘박하경 여행기‘는 걷고 먹고 멍 때리면서 낯선 사람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이야기다. 요즘처럼 바쁘고 무서운 시대에 배우 이나영은 느리고 무해하게 살고 있다. 그녀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었다. 가방에는 연필과 메모지, 그리고 줄 이어폰이 들어 있었다.

-무선 이어폰 안 쓰시나요. 지춘희 디자이너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무선은 사용해본 적 없어요. 저는 이게 편해요. 지춘희 선생님과 만난 지 20년쯤 된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나이 들어 보이겠지만 저는 인간관계를 맺으면 기본 10년 이상 가요. 선생님 댁에서 밥도 자주 얻어먹어요.”

-복귀작 ‘박하경 여행기’는 힐링 드라마인데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저도요! 그런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어요.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냥 툭툭, ‘남자 친구 있어요?’ 이런 이야기하는데 그게 현장에서 갑자기 만든 대목이었거든요. 감독님이 조금 장면이 모자랄 것 같다고 해서(웃음). 이 드라마는 어색한 게 힘이구나. 다들 처음 만나는 설정인데 안 어색한 게 이상하죠.”

-’고독한 미식가’의 당일치기 여행 버전 같더군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먹는 장면도 나오고 담백하고.”

-박하경도 그렇고 이나영도 정말 욕심이 없어 보여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요. 배역 욕심은 없지만 다른 욕심은 있어요. 저는 식탐이 강해요.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가만히 있을 때도 스스로 ‘이나영, 너 오늘 이거 먹고 싶니? 아니면 저거 먹을래?’ 하면서 끊임없이 물어봐요. 하하.”

-그런데 어떻게 몸매 관리를?

“옷으로 잘 가려요. 먹고 싶은 거 먹고 저기 보이는 스타일리스트 언니한테 연락해요. ‘어떻게 한 치수 큰 걸로 좀 안 되겠어요?’ 벼락치기 다이어트도 하긴 하는데, 언제나 식탐이 의지를 이겨요. 약간 ‘인생 뭐 있어? 그래도 이런 게 소소한 행복인데’ 싶기도 하고요.”

지춘희 디자이너의 미스지 컬렉션 원피스를 입은 배우 이나영. 이나영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기도 한 지춘희는 “나의 뮤즈는 이나영”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은 어떤 음식이 당기나요?

“즉석 떡볶이! 채소와 어묵 사리를 넣어 먹는 건 늘 행복한 조합이죠. 또 김치전과 매생이전, 짜파게티와 파김치도 떠오르네요.”

-배우 성동일이 왜 ‘이나영은 재래시장 같은 여자’라고 했는지 알겠네요.

“제가 순대, 튀김도 좋아하니깐(웃음). 먹을 때 그냥 막 먹기도 하고, 저는 잘 차려 먹는 걸 싫어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너 참 털털하고 은근히 웃기다’고 해요.”

-’박하경 여행기’ 부산 편에서는 밀면을 정말 맛있게 먹더라고요.

“제가 그날 밀면을 처음 먹어봤거든요. 부산에 가면 다른 먹을 게 많으니까. 큰 기대가 없이 한입 딱 먹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컷 하기 전에 이걸 다 먹자’ 했어요. 그런데 또 하나, 제가 먹기 전에 ‘후’ 하고 불고 먹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해서 후 불었나?’ 생각했어요. 평소 제가 촬영할 때는 라면과 김밥을 많이 먹거든요. 라면 먹던 게 버릇이 돼 본능적으로 불었나 싶기도 하고.”

-박하경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적이라면.

“없어요. 저는 스트레스받을 땐 친구들 만나 털어내는 스타일이에요. 데뷔 초기에는 혼자 울면서 많이 좀 게워냈어요. 아파트에 살 때였는데, 옥상에 맥주 한 캔 가지고 올라가 마시면서 울면 정화되고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수다 떨거나 맛있는 거 먹으면서 털어내요. 여행도 좋은 출구고요.”

-이 드라마 속 장면처럼 묵언 수행을 하고 싶은 순간도 있는지.

“묵언은 나 안의 나와 대화하는 거잖아요. 저는 ‘지구 전체가 한 사흘 정도 묵언 수행을 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가끔 해요.”

-인류 전체가요?

“다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게 답답해요. 재해나 그런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뭔가를 딱 멈추면, 즉 묵언 수행 같은 것을 하면 저마다 뭔가 불필요한 것은 덜하게 되고 생각은 더 하게 되지 않을까요. 필요한 것을 더 느낄 수도 있고요.”

◇데뷔 25년, 중년의 위기는?

영화 '후아유'

이나영은 1998년 청바지 브랜드 CF 모델로 데뷔했다. 청순하고 여성스럽고 좀 엉뚱한 구석이 있다. 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기 시작한 건 2002년 영화 ‘후아유’부터. 상대방에게 누구냐고 묻는 채팅 게임 사이트에서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영화 이후로는 내면의 아픔을 누르며 살아가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어릴 적 꿈이 배우였나요.

“어릴 때는 꿈이 별로 없었어요. 그냥 친구가 뭐 한다고 그러면 ‘나도!’ 이러는 애였죠. 지금도 그날그날 닥치는 대로 하는 편이에요. 모델로 캐스팅됐을 때는 편입 시험 준비를 하며 영어 공부를 하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어릴 때부터 튀는 외모였을 텐데 ‘미스코리아 나가야지?’라는 말 많이 들었죠?

“미스코리아는 그냥 어른들 덕담 같은 거잖아요. 저는 그런 칭찬을 밀어내는 성격이에요. 수업 시간에 뭘 알아도 손을 못 들고, 치마도 입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데뷔 초반은 어땠나요.

“저는 이 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어요. 낯을 많이 가렸고요. 사진을 찍을 때 웃어야 하는 것도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저를 길거리 캐스팅한 분도 ‘네가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신인 시절에 항상 밝고 활기차게 보여야 해서 ‘나는 정말 이 일을 못하겠구나’ 할 때쯤 ‘후아유’ 시나리오를 만난 게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전에는 연기를 암기식으로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후아유’는 정말 처음으로 애정이 생긴 배역이라, 그 인물에 대한 일기도 쓰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연구라는 걸 하기 시작했죠.”

-그 작품부터 예쁘고 행복하기보다는 털털하고 상처받은 인물을 많이 연기한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아픔이 있는 배역 쪽으로 자꾸 마음이 가나 봐요. 그래도 딱히 정한 건 없어요. 감독님들, 저는 공포물만 좀 무서워할 뿐 코미디도 좋아하고 뭐든 다 열려 있습니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의 정재영(왼쪽)과 이나영(오른쪽)

-영화 ‘아는 여자’ 이후로는 연기상이 없는데.

“욕심이 있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한테는 대작들만 골라서 할 머리 자체가 없어요. 그냥 주어진 대로 합니다.”

-어떤 배역에 들어가는 나만의 방법이라면.

“일단은 감독님과 대화를 굉장히 많이 해요. 조사 하나까지도. 그리고 저는 패션이나 색감, 걸음걸이 등 전체적인 룩이 좀 나와야 수월해지더라고요.”

-흥행작은 별로 없는데 괴롭지 않나요?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제작과 투자를 한 분들을 위해선 흥행해야 하고 손해를 보면 안 되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연기와 홍보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걸어 다녀도 아무도 못 알아본다면서요.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니는 겁니까.

“하하. 진짜 못 알아봐요. 요즘엔 모자 쓰고 마스크 끼니까. 아니 마스크를 안 써도, 제가 휴게소 같은데 들어가도 쳐다보고 이런 걸 못 느껴요.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녀서 그런가. 졸라맨처럼 맨날 검은색 트레이닝복만 입거든요. 아는 언니가 ‘선글라스 좀 쓰고 다녀라’고 하기에 이랬어요. ‘너무 튀어요 언니, 연예인 같잖아요!’”

-여배우는 결혼과 출산을 하고 40대 중반에 위기를 겪는데.

“저는 결혼과 출산 이후로 별로 바뀐 게 없어요. 제가 둔해서인지, 20대나 지금이나 들어오는 작품도 거의 비슷해요. 요즘은 워낙 여성 영화가 많아지기도 했고.”

◇결혼 후 ‘경단녀’ 이나영의 소확행

2015년 이나영과 원빈이 강원도 정선의 밀밭에서 올린 결혼식. /이든나인

이나영과 원빈은 2015년 5월 정선의 푸른 밀밭에서 화촉을 밝혔다.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름 없는 들판을 찾아다녔고, 예식이 끝나곤 밀밭 위에 가마솥을 걸고 뜨끈한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스타들의 결혼식 중 가장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된다.

-이상형이 ‘잘 생기지 않은 남자’라고 했는데 그분과 결혼을 하셨어요.

“같은 사무실이었고, 둘 다 촬영 등 힘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어요. 비슷한 성향이다 보니 잘 통했던 것 같아요.”

-결혼식 장소는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둘이 같이 결정했어요. 둘 다 그냥 성향이 비슷해서 딱 맞아떨어졌어요.”

-당시 소속사를 통해 ‘태어나고 자란 땅 위에 뿌리내린 경건한 약속을 기억하며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살겠다’며 ‘이제 각자 배우라는 자리로 돌아가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다’고 했지요.

“결혼과 출산 후 복귀작이 ‘뷰티풀 데이즈’였어요. 제가 그런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나 ‘귀주 이야기’ 같은 작품을.”

영화 ‘뷰티풀 데이즈’에서 탈북 여성을 연기한 이나영. “눈동자에서 연기하고 싶다”던 그는 영화에서도 입보다 눈으로 더 많은 얘기를 한다.

-그다음은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인데요. 무명조차 없던 이나영의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연기에 대중이 공감할 수 있을까 의심했어요.

“제가 그걸 전달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은 제 캐릭터가 아니라 이나영을 본 거죠. 그런 고민은 안 하는 편이에요. 잘 설득하고 전달하자는 생각만 해요. 결혼과 육아 이후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게, 일을 쉬면서 아이와 있을 건지, 경력 단절을 줄이면서 아이를 두고 경제적 여유를 선택할 것인지, 그런 고민들에 공감했어요.”

/스튜디오 드래곤 책 만드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중의 한 장면.

-’원빈의 근황이 궁금하다면 이나영을 만나라’는 말이 있어요. 남편은 영화 ‘아저씨’(2010) 이후 출연작이 없는데, 혹시 은퇴한 것인가요?

“본인이 직접 기자회견을 한번 해야겠네요(웃음). 계속 열정은 있어요. 때가 되면 하겠죠? 같이 좋은 영화 보면 되게 하고 싶어해요, ‘박하경 여행기’도 되게 좋아했고 약간 부러워했어요. 아마 또 좀 남성 배우들한테는 그런 작품이 덜 가는 것 같아요. 본인도 고민이 좀 많겠지요 뭐.”

-같이 출연하실 계획은.

“일단 (시나리오를) 봐야죠. 액션을 해야 하나? 코미디로도 갔으면 좋겠고!”

-고부 관계도 좋은 걸로 유명한데, 어떤 며느리인가요?

“남들과 다를 거 없어요. 친구 같아요. 시부모님은 저를 특별하게 안 보시니깐.”

원빈의 아버지는 그가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하자 “강릉 시내만 나가도 너보다 잘생긴 애 널렸다.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루 일상은 어떻게 되는지요.

“굉장히 평범해요. 제 나이 또래 사람들과 비교해 특별할 게 없어요. 한 가지 바뀐 건 애들을 보는 제 마음이 변화된 거예요. 전에는 경험이 없으니 막연히 어떤 추상적인 것들을 생각했다면 이젠 어떤 아이를 봐도 조금 더 눈이 가죠.”

<아무튼주말> 이나영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시간이 남으면 뭘 하나요.

“멍을 때리거나 책을 읽어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을 좋아해요. 요즘엔 희망적으로 끝나는 영화가 좋아요. 힘든 걸 잘 못 보겠더라고요. 가장 좋아하는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예요. 팬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어요. 제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결국 기본으로 가게 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불안한 존재니까요.”

타고난 외모로 편하게 사는 배우라는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나영은 어릴 적부터 일기를 썼다. 데뷔 직후에는 자책을 많이 했다. 그녀는 “종이에 뭔가 끄적거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게 나온다”며 “상처와 아픔이 있는 주인공이 치유하는 스토리에 끌린다”고 했다.

“박하경도 저도 자기애가 많아요. ‘박하경 여행기’는 예상치 못한 우연과 기적 같은 만남을 그린 명랑 유랑기예요. 어떤 분들은 제가 눈동자로 사람을 본 게 좋았다고 해요. 현실의 저는 먹는 것과 일기를 쓰는 게 소확행이에요(웃음). 바쁘고 무서운 요즘 세상에는 말 그대로 묵언 수행을 하면서 저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아무튼주말> 이나영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