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법정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니 기억을 잘 못해서 안면 인식 장애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해 논란이 됐다. 작년 대선 때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관련해 김문기씨를 모른다는 취지로 말해, 허위 사실 유포 관련 재판을 받고 있는데, 진짜 김씨를 모른다고 강조하려 안면 인식 장애라는 말까지 꺼낸 것이다. 이 대표와 김씨는 호주로 놀러 가서 골프를 쳤다. 김씨는 핸드폰에 이 대표 생일도 저장해놨다. 이 사건이 터진 뒤 김씨는 극단적 선택을 해 고인이 됐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김씨를 모른다고 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일 작년 대선 때 허위 발언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법정에서 김문기씨를 모른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안면 인식 장애냐는 비판을 받는다”고 진술했다. /고운호 기자

정치권에선 순간을 모면하고자 ‘장애’까지 언급한 걸 두고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일각에선 “안면 인식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모르냐” “장애를 우습게 보냐”는 분노도 쏟아졌다. “기억에 없다”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은 수사선상에 오른 정치인의 수법이긴 하지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유력 정치인으로서 약점이 될 수 있는 말을 하다니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못 알아봐도 아는 척하는 게 정치인

‘저 정도면 안면 인식 장애 아니냐’는 말을 듣는 정치인은 상당히 많다. 한 야당 정치인은 선거 중에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보좌진에게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네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그 보좌관은 당황했지만 주변에서 본 측근들은 “얼마나 사람을 많이 만나면 못 알아보겠냐”고 대신 해명하기도 했다. 여당의 한 대선 주자가 만날 때마다 지인에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한 일화도 유명하다. 모 대학교수가 2017년 강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서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력이 상당히 나쁜 것 같다. 공약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라며 문 전 대통령의 안면 인식 장애를 언급한 적도 있다. 학생들의 반발이 컸고 이 교수가 출연 중인 방송사 노조는 “출연 금지 등을 조치하라”고 난리를 쳤다. 다만 당시 문 대통령 측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도 “아주 틀리는 말은 아니지 않으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런 정치인들도 “아무래도 내가 안면 인식 장애인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숨긴다. 대중의 표를 받아야 당선되는 정치인에게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건 치명적 결함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잘 모르겠어도 잘 아는 듯 행동한다.

그런데도 이재명 대표는 안면 인식 장애를 언급했다. 그는 “정치인은 상대가 자신을 기억해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제일 곤란한 경우가 ‘저 아시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행사에서 보거나 밥을 같이 먹었다고 하더라도 기억이 안 나 안면 인식 장애라고 비난받기도 한다”고 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이 대표가 안면 인식 장애라면 정치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왔다.

◇종국엔 자기 얼굴도 못 알아봐

안면 인식 장애는 안면실인증이라는 병이다. 시각장애나 시력에 큰 이상이 없고 상대방이 분명하게 보이는데 얼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물이나 장소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주로 얼굴 알아보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알츠하이머, 단순 건망증 등과는 차이가 있다. 선천적으로 뇌 발달에 이상이 있거나, 후천적인 외부 충격 등으로 뇌의 하부 후두 측두엽이 손상된 경우가 원인으로 꼽힌다.

인터넷에는 안면 인식 장애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 리스트도 올라와 있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낯선 적이 있다’ ‘TV 속 인물 구별이 쉽지 않다’ 등이다. 전문가들은 “안면 인식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은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가 쉽지 않다”며 “더 심각해지면 실제 자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고 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아직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어 문제라고. 그러나 심각해지면 가족과 본인 얼굴도 못 알아보는 상황까지 갈 수 있는 치명적 병이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과거 인터뷰에서 “안면실인증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는데, ‘어디서 만났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오히려 불쾌하게들 생각한다”며 “그래서 요즘엔 집에만 있는다”고 했다.

안면 인식 장애 운운한 이 대표에게 국민의힘 지도부도 이렇게 권했다.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라고 우기는 선택적 기억상실 증후군을 비롯해, 상식과는 동떨어진 심각한 안면 인식 장애 증후군까지, 국민 염증을 가중시키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조속히 치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