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고도 더위는 물러날 기세가 없다. ‘처서 매직’은 이제 통하지 않는 걸까. 긴 겨울 끝자락 봄기운이 그리울 때 남도 여행을 떠나듯, 물러갈 기세가 없는 늦여름 염천이 힘에 부치면 영동(嶺東)으로 떠날 일이다. 처서 매직은 미덥지 못해도 ‘태백 매직’은 분명하다. 올여름 태백산맥을 넘어, 아니 산맥 아래 서울-양양고속도로의 긴 터널을 지나 두 번 속초를 찾았다.
속초에서 여행객들 손에 들린 네모 상자는 피자가 아니라 닭강정이다. 리조트로 배달되는 높다란 상자 더미도 마찬가지다. 가마솥으로 튀겨낸다는 청초호 주변 닭강정의 인기는 여전하다. 동해에서 건져 올린 신선한 해산물 요리도 지나치기 어렵다. 활어회는 물론 여름에 먹는 곰치탕도 별미다. 대기 줄이 길어 속초에 올 때마다 찾던 중앙부두길 생선구이집을 들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해안이 닭강정과 해산물 천국이라면 설악산 부근은 순두부 차지다. 학사평 콩꽃마을 순두부촌은 미시령 46번 국도로 이어지는 속초IC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마을에는 콩을 물에 불리고 맷돌에 갈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손두부를 만드는 전문점들이 즐비하다. 갈아낸 콩물을 굳히는 응고제로 간수 대신 미네랄이 풍부한 해수를 쓴다는 점에서 강릉 초당순두부와 닮았다.
‘최옥란할머니순두부’는 학사평 바로 건너편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메뉴가 있다. 바로 옥란정식(2인 5만원)이다. ‘초당순두부’와 ‘얼큰순두부’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모두부, 황태구이, 가자미구이, 도토리묵, 메밀전병과 밑반찬이 곁들여진다. 구성이 절묘하고 메뉴마다 고유의 풍미가 있다.
두부는 콩이 부르는 순백의 마법이다. “두부처럼 하얗게 살라고, 다시는 죄 짓지 말란 뜻으로 먹는 겁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13년 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모범수로 석방된 금자씨(이영애)에게 목사가 두부를 건네며 한 말이다. 출소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풍습은 일제강점기에 생겨났다고 한다. 순백의 상징성에 영양까지 고려한 결과일 터이다. 금자가 건네받은 두부를 뒤엎으며 되돌려 주는 명대사, “너나 잘하세요”는 영화의 전개를 암시하는 강렬한 메타포이다.
두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콩과 물, 그리고 응고제로 쓰는 간수가 전부다. 조리 과정도 복잡하지 않다. 하루 정도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물을 넣고 끓인 뒤 간수를 첨가해 응고시킨 다음 물을 빼내면 두부가 완성된다. 하지만 두부가 내는 맛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가열하는 시간, 응고제의 종류, 굳히는 강도에 따라 순두부부터 네모난 모두부, 연두부, 콩비지까지 모양도 식감도 다양하다.
두부의 기원은 논쟁거리다. ‘초한지’의 주인공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이 기원전 2세기에 두부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10세기 이전 중국 문헌에서 두부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식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음식이자 식재료인 두부는 서양의 치즈에 빗댈 수 있다. 색깔과 조리 과정이 유사하고, 맛과 형태의 변이가 다양하며, 고단백이라는 점까지 닮았기 때문이다.
최근 두부의 변신은 눈부시다. 두부 스테이크나 강정, 젤라토, 푸딩까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다. 두부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케이크, 우유는 물론 두부 면이나 파스타도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다이어트와 채식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두부가 인기를 끄는 비결이다. 두부를 응용한 한식은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큰 주목의 대상이다.
명절 때면 어머니는 순두부를 한 솥 끓이곤 하셨다. 구이부터 전골까지 두부를 활용한 메뉴도 다양하고 최근 두부의 변신도 반갑기는 하지만, 식당에 가면 매번 순두부를 고른다. 어린 시절 솥 안에서 벌어지던 순백의 마법이 그리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