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학연·지연을 비롯해 이른바 ‘끼리끼리 문화’가 있잖아요. 그런데 재외동포를 선수단장으로 뽑다니,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체육계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분야예요. 저를 선임한 배경에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달 23일부터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제19회 아시안게임은 개막하기도 전에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역대 최초로 재외동포가 대한민국 선수단장을 맡은 것이다. OK금융그룹 최윤(60) 회장은 재일교포 3세 사업가다. 코로나 여파로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역대 최대인 선수단 1180명을 이끌고 종합 2위 탈환에 도전한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최 회장은 비행기 날개처럼 위아래로 문이 열리는 테슬라 중형 세단에서 나타났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대뜸 “제가 새로운 건 꼭 해봐야 하는 성격”이라며 씩 웃어 보였다. 그는 회장님보다 부장님 같은 푸근한 인상을 풍겼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달라졌다. 산전수전과 공중전을 다 겪어낸 도전적인 사업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자이니치(일본 거주 한국인)로 차별받고 자랐지만 국적을 버릴 순 없었습니다. 내 뿌리니까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 게 헝그리 정신처럼 저를 무장시킨 것 같아요. 지금은 대한민국에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한 때 우리나라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500달러였는데, 지금은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됐어요.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나라인 겁니다.”

최윤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이 럭비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최 단장은 고교 시절 럭비 선수로 활약했고, 현재 대한럭비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럭비로 인생을 배웠다

1920년대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1963년 나고야에서 태어난 최윤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견뎌내며 살아왔다. 한국어 발음은 조금 서툴렀다. 최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일본 사람들한테 지지 마라’ ‘일본 사람이 괴롭혀도 맞고만 있지 마라’ 이런 얘기들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고 자랐다”며 웃어 보였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둔 소감이라면.

“공교롭게도 제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갈 때마다 개최국과 우리 관계가 미묘하네요. 선수단 부단장을 맡은 지난 도쿄올림픽 때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엔 한중 관계가 그렇잖아요. 다시 긴장이 됩니다. 하하.”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개최국 중국은 만반의 준비를 해왔고 우리의 라이벌인 일본은 10년 전부터 많은 투자를 했어요. 목표는 2위 탈환입니다. 선수들이 5년간 고생하고 준비하며 쌓은 실력을 발휘하도록, 특히 억울한 판정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국민은 이번 기회에 스포츠를 좀 다른 시각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시각이라니요?

“스포츠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즐기는 것이어야 해요. 일본이나 선진국은 그게 잘되고 있습니다.”

-생활 스포츠라는 저변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체제 경쟁의 역사 때문에 엘리트 선수 육성에만 집중했어요. 여전히 ‘스포츠 하는 놈은 스포츠만 하고 공부는 열외’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학교 수업 시간이나 방과 후에 스포츠 클럽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고, 그중에서 엘리트 선수가 나와야 합니다. 사회에 진출한 뒤에 스포츠를 배우는 우리 관행은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도 일회성으로 즐기는 경향이 있지요.

“스포츠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요. 이번 아시안게임부터 메달 순위보다 선수 개개인의 노력, 어떤 도전을 하는지 주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교육부터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스포츠 대국이 돼요. 교육부가 좀 나서야 됩니다.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한 선수들이 이렇게 큰 국제대회가 열릴 때만 반짝 인정받는 그런 문화를 바꾸고 싶습니다.”

최 회장은 스포츠에 누구보다 진심인 열정남이다. 2015년부터 럭비협회 부회장을 거쳐 현재는 협회장을 맡고 있고, 지난 3월에는 아예 럭비단을 창단했다. 10년 전에는 남자 배구단을 창단해 2년 만에 우승을 일궜다. 도쿄올림픽 때 부단장을 맡고 이번에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으로 임명된 것도 최 회장이 폭넓은 경험으로 선수단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윤 OK금융그룹 회장은 고교 시절 럭비 선수로 활동했다. 한 가운데 서 있는 선수가 고교 시절 최윤 회장./최윤 회장 제공

-고교 때 럭비 선수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실패해도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七顚八起)로 도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럭비 같아요. 럭비를 하면서 도전 정신, 리더십, 협동심 등을 체득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데, 럭비의 매력은 뭡니까.

“럭비는 사회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사회라는 게 체격도, 생각도, 재능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잖아요. 럭비도 1번부터 15번까지 역할이 제각각이고 그에 맞는 체격도 다 달라요. 그런데 한 팀으로 뭉쳐 각자 제 역할을 해야만 이기는 게임이에요. 럭비는 또 몸을 부딪치잖아요. 가끔은 그게 무서워요.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공포를 이겨냅니다. 혼자 싸우라면 무서워서 피할 수도 있는데, 럭비는 팀원들이 다 지켜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마주하고 부딪쳐 나가는 매력이 있습니다.”

-광고 효과가 높지 않은 비인기 종목들을 지원하는 까닭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럭비가 리스펙트(존경)를 받아요. 우리나라 럭비는 여건이 너무 열악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럭비가 가진 정신과 장점이 더 확산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직접 럭비협회에 찾아가 ‘돕겠다’고 했습니다.”

-10년 전에 남자 배구단도 창단했는데.

“주인을 잃고 표류하던 드림식스 배구단을 인수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일단 1년을 네이밍 스폰서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하다 보니 배구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인수하겠다고 했더니 우리가 배제되고 우리금융그룹과의 경쟁에서 졌지요. 거기서 오기가 생겼습니다(웃음). 그래서 신생팀을 만든 거예요.”

-김세진 감독을 임명한 것도 화제였습니다.

“제 경영 철학이 ‘이단에서 출발하여 정통으로 올라선다’예요. 프로에서 이단이 뭘까요? 신생 구단으로서 대학교 3학년 이하를 필두로 한 팀이라 새롭고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김세진 감독을 만나 보니 정말 치밀하고, 통찰력도 대단하더라고요. 당시 감독들 평균 연령이 60세 가까이 됐습니다. 저희가 39세 초보 감독을 발탁한 게 이단이었는데, 창단 2년째 우승하면서 정통으로 올라섰죠.”

-배구팀에 일본인 지도자를 데려온 이유라면.

“10년간 이어지니 다시 매너리즘이 생겼어요. 외국인 감독 중에 일본 감독은 체격의 열세를 극복하고 경기력을 높은 수준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탐이 났습니다. 한일 관계도 좋아지면서 언론이나 팬들도 너그럽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차별과 오해에 끊임없이 맞서다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곱창집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운동선수와 사업가, 인생의 두 항로 사이에서 고민하 대학 시절 건설하청업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한국식 불고기를 파는 ‘신라관’으로 대박이 났다. 15년 만에 신라관의 야키니쿠(燒肉·구운 고기)는 일본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체인점이 60여 개로 늘면서 최 회장은 재일교포를 대표하는 청년 사업가가 됐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는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지 않으면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직할 방법이 없었어요. 홀로 설 수 있는 직업은 사업가나 연예인, 스포츠 선수나 의사 정도인데, 저는 사업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하는 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차별이 힘들지 않았나요.

“한국계 초등학교에 다녀서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감추지 않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반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지요. 그런데 추석을 쇠고 나니 저 말고도 차례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온 친구가 2명 더 있었습니다. 한국인인 걸 숨기고 일본인인 척할 정도로 차별과 압박을 받았죠.”

-초등학교 때 신문배달, 중학교 때는 대학생인 척하고 공사장 인부로 일했다고요?

“용돈이 필요했어요. 공사장에서 일할 땐 힘이 있으니 남보다 일을 두 배로 했어요. 그때 관리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일당을 두 배로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공부는 어머니한테 얻어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습니다(웃음). 그런 경험 덕분에 대학에 진학해서 선후배들을 모아 건설하청 회사도 창업할 수 있었죠.”

-신라관으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경영회사로서 처음으로 어떤 체제를 갖췄다고 할까요. 그런데 신라관을 경영하면서 뒤늦게 대학 때 공부하지 않은 걸 후회했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사기도 당했어요.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구태여 겪지 않을 실패들을 하게 되더군요. ‘공부는 다 때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벤처캐피털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경영을 해보니 회사를 크게 하는데 시간을 단축하려면 금융 시스템을 잘 알아야 하더군요. 사업을 하나씩 키우는 것보다 투자를 해야 된다는 걸 배운 거예요. 그리고 고국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1999년에 벤처캐피털 회사를 열었는데,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크게 실패했죠.”

-왜 실패한 건가요.

“제가 배우지 않은 상태로 남을 믿고, 남을 시키면서 투자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하고, 직접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자신 있는 분야라야 하는구나. 경영진한테 그냥 다 맡기고 돈만 주고 ‘해봐’ 한 게 정말 바보 같은 결정이었죠.”

벤처캐피털로 쓴맛을 본 최윤 회장은 2002년 소비자 금융회사인 ‘원캐싱’을 설립한 뒤 재일교포 상공인들을 설득해 2004년 에이앤오(A&O)그룹을 인수했다. 이른바 ‘러시앤캐시’로 알려진 소비자금융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벤처캐피털에 실패했을 때 가족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했다면서요.

“실패자로 돌아가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어요.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러다 에이앤오 그룹이 매물로 나온 걸 봤어요.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있는데 이제 개인의 신용을 계산해서 소액을 대출해주는 소비자금융 시장이 곧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부업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데.

“대부업, 사채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대부업은 신용대출이 아니라 채권, 부동산 등 담보를 다 받아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개인의 직장, 경제 상황, 환경 등으로 신용을 계산해 연체 확률을 파악한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어려운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 이번 달에 못 갚을 사람한테 빌려주는 건 못 해요. 제가 고깃집을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봐도 무일푼인 손님이 와서 고기 드신다 하면 받을 수 있나요? 그럴 땐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수밖에 없죠(웃음). 대부업도 마찬가지예요.”

-소비자금융은 성선설(性善說)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대부업은 성악설로 봐요. 돈을 빌리는 사람은 돈을 갚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담보를 받아야 되고 협박해야 되고 보증을 받아야 되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객은 빌린 돈을 갚으려 한다는 믿음으로 봅니다. 돈을 갚지 않으려는 사람은 정말 일부고, 그러니 우리가 신용을 잘 계산하고 관리하는 거예요. 저는 소비자금융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에 더 투명하게, 합법적으로 경영을 했습니다. 오로지 고객, 시장, 라이벌만 보면서 살았습니다.”

24일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D-30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윤 선수단장 /뉴시스

◇재일교포 사업가가 보는 한일관계

OK금융그룹은 저축은행을 인수하며 창업 20년 만에 자산 규모 약 20조원, 19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 됐다. OK금융그룹의 ‘OK’는 ‘Original Korea’, 즉 ‘토종 한국’이라는 뜻. 최 회장이 ’진짜 한국, 진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함께 ‘저를 한국 사람으로서 지켜봐주세요’라는 뜻으로 직접 지었단다. 토종 만화 캐릭터인 태권브이를 모델로 사용한다.

-두 자녀 이름이 최선, 최다해라고 ‘최선을 다해’라고 들었습니다. 사내 공모로 이름을 지었다고요.

“최선은 제가 지었고 다해는 사내 공모로 지었어요. 한자가 아닌 순 한글 이름입니다. 우리끼리 ‘정말 최선을 다하자’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아이들도 자기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사실 제 욕심 같아선 셋 더 낳아서 ‘최선을 다해, 최고를 향해 OK’까지 가고 싶어요. 최고, 최향해, 최읏 이렇게요. 하하.”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서 돈의 의미도 달라졌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똑같아요. 야구 선수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연습도 안 하고 그러나요. 오히려 보는 눈이 더 많아지고 그만큼 책임감이 생깁니다.”

-한국과 일본을 다 진하게 겪으셨네요.

“1980년대부터 1991년까지 일본이 GDP 1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갔던 기적을 봤고, 우리나라에선 또 2002년부터 1만달러에서 3만달러까지 성장하는 걸 목격했어요. 저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우리 정부가 어떻게 이끌고 풀어갈지 주목하고 있어요.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진 국민은 전 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30년간 정체됐는데도 정치에 불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우리 국민은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대기업 의사결정권자가 대부분 한 사람이에요. ‘오너 경영’이 부작용도 많지만 세습이나 리더십을 없애고 합의체로 만든 일본 기업들과는 확실히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리스크에 맞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두 가지 때문에 한국은 일본처럼 30년이 아니라 5년, 10년으로 위기를 짧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2019년 반일 열풍이 불면서 억울하게 친일 기업으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이에요. 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가야한다고 봅니다. 사과를 요구하고 공격만 할 게 아니라 양보할 건 양보하면서 가는 게 대등한 관계예요.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봐, 하는 겁니다. 그게 한일 관계의 발전적 파트너십이 되지 않을까요.”

-아시안게임처럼 한일은 결국 라이벌 아닌가요?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선의의 라이벌이 돼야죠. 우리 국민들만 보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보고 있어요.”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으로서 각오라면.

“2위가 목표인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각자 위치에서 고생한 선수들, 가족들, 코치들 이런 분들에겐 지금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중요한 시기예요.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연습하고 지켜봤는지 생각해주시면서 힘껏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야구, 유도, 골프 등도 후원해온 최윤 회장은 장학 사업도 한다. 대한민국 제1호 재외한국학교인 '오사카 금강학교'가 학생 수 급감과 적자 운영으로 존폐 위기에 놓이자 구원투수로 나섰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