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등록부 성별란에 기록된 ‘남’을 ‘여’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
한국 땅에서 고환과 음경을 갖고 태어난 A씨는 그러나 스스로를 여성으로 여겼다. 만 17세가 된 2015년부터 여성호르몬을 투여했다. 이후 학교와 직장에서도 여성처럼 생활했다. 다만 성전환 수술을 받지는 않았다. 수술 없이 법적으로 여성이 되고 싶었던 A씨는 법원에 성별 정정 허가를 신청했다. 1심에서는 좌절을 맛봤다. 남자의 신체를 지녔음에도 여자로 인정할 경우 “사회적 혼란과 혐오감·불편감·당혹감 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A씨는 항소했다. 그리고 지난 2월 서울서부지방법원 제2-3민사부는 “외부 성기가 어떠한가는 성 정체성 판단을 위한 평가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며 요청을 받아들였다. “정신적 요소가 정체성 판단의 근본적 기준”이라고 판시했다. 객관적 식별이 가능한 생물학적 요소가 아닌 정신성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우선시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의사에 반하는 성전환 수술 강제가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므로 수술이 아닌 다른 요건에 의해 성 정체성 판단이 가능하다면 그에 의해 판단하면 된다.”
◇나 오늘부터 여자(남자) 할게요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독일에서는 법적으로 자신의 성별을 바꾸고 싶은 경우, 호적사무소에 관련 서류만 내면 된다. 호르몬 치료나 성기 제거·재건 같은 수술 역시 필요치 않다. ‘남성’ ‘여성’ ‘다양’ ‘기재 안 함’ 중에서 원하는 옵션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1년 뒤에 재변경도 가능하다. 남자에서 여자로, 마음이 바뀌면 다시 여자에서 남자가 될 수 있는 너무도 편리한 길이 열린 것이다. 지난달 23일 의결된 ‘자기 주도 결정법’ 제정안 때문이다.
덴마크·아일랜드·노르웨이·포르투갈·스위스 등에 이어 지난 2월 핀란드 의회 역시 ‘자기 선언’만으로 법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유럽에서는 20여 국가가 이 제도를 택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도 지난해 12월 유사한 내용의 트랜스젠더 권리 법안이 통과됐다. 기존에 성별을 바꾸려면 치료 내역 등 증빙 서류와 육체·정신의 성적 불일치를 인정하는 진단서를 법원에 제출해야 했는데, 이 절차를 모두 없앴다. 행복 추구권과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지지 기반이 커지면서, 성별을 결정짓는 기준이 의학이 아닌 당사자의 ‘주장’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여성 안전 침해” 경고 목소리도
반발도 거세다. 한국교회총연합은 서울서부지방법원 판결 이후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남성의 가장 기본적인 표지인 생식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여성으로의 성별 정정 허가는 과학적 성별 결정 기준을 무시하는 월권이요 오만”이라며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무분별한 성별 정정이 초래할 사회적 혼란과 인권침해”라고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빈발하는 현재 상황에서 남성의 성기를 가진 ‘여성’을 법적으로 인정하면 진짜 여성의 안전권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우람한 ‘신분상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달고 여탕이나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5월 미국의 한 남성이 여자 탈의실을 사용하려다 제지당하자 해당 요가 학원을 상대로 500만달러(약 66억원) 상당의 민사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일었다. 뉴욕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이 남성은 호르몬 주사를 맞는 중이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아 남성의 주요 부위를 그대로 달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부 여성은 고함을 지르며 불편을 호소했다. 2016년 뉴욕시가 제정한 인권법에 따라 뉴욕 시민은 자기가 원하는 성별을 선택할 수 있고, 이를 존중하지 않을 시 처벌받는다.
◇‘정치적 올바름’ 휩쓴 세계는 지금?
현재 우리나라 대법원은 성별 정정 허가에 성전환 수술을 전제하는 사무처리 예규를 갖고 있다. 성전환 수술에는 건강 상의 위험, 경제적 부담 등이 뒤따른다. 성소수자 시민단체가 “자기 결정권”을 들어 지속적인 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대법원장에게 대법원 지침 변경을, 국회의장에게는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2020년 해당 예규에서 외부 성기 여부나 생식 능력의 상실 및 재전환 가능성을 ‘조사 사항’에서 ‘참고 사항’으로 낮춘 바 있다. 이듬해 수원가정법원 판결처럼 유화적인 제스처도 잇따르는 중이다. “생식 능력의 비가역적 제거를 요구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체의 온전성을 손상토록 강제하는 것으로서 자기 결정권과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결과가 된다.”
악용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성전환 간소화법’ 개정안이 통과된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 1월 황당한 소동이 벌어졌다. 이슬라 브라이슨(31)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남자’였을(?) 당시 두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붙잡혀 징역 8년이 선고됐는데, 재판을 기다리던 도중 호르몬 처방을 받으며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도했고, 여자 교도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여성을 강간한 범죄자가 자신을 여성이라 주장하며 여성 사이에 격리되자 여론은 들끓었다. 브라이슨의 전 아내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성 정체성에 관해 말한 적 없다”며 “사법 당국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결국 브라이슨은 남자 교도소로 이감됐다.
◇무엇이 평등인가… 골치 아픈 스포츠계
‘신체’로 승부하는 스포츠 업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성전환 수술 없이 호르몬 요법을 받고 2021년부터 여성부 경기에 출전한 미국 수영 선수 리아 토머스(23)가 대표적 예다. 남성부에서는 400위권 선수였으나 여성부에서는 최정상급으로 도약했다. 불공정 시비가 일었다. 관중석에는 ‘여자로서 경쟁하는 남성을 거부한다’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리아 토머스와 함께 훈련한 한 여성 선수는 “키 193㎝의 생물학적 남성 앞에서 강제로 옷을 벗어야 했다”며 피해를 호소했다.
한국에서는 나화린(37)씨가 논란의 복판에 섰다. 지난 6월 강원도민체육대회 사이클 종목에 출전해 2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나씨는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경우다. “제가 아무래도 우월한 입장에서 경기를 하다 보니 등수를 하나씩 뺏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 죄송한 마음”이라며 경기 후 다른 선수들에게 음료수를 돌린 나씨는 “남녀가 아닌 성전환자를 위한 제3의 부문을 만드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다수의 지적을 수용해, 지난달 국제사이클연맹은 남성으로 사춘기를 겪은 뒤 성을 전환한 선수들의 여성부 출전을 막고, 기존 남성부를 ‘남성·오픈부’로 바꾸기로 했다. 과학적 분석에 토대를 둔 조치라고 연맹은 설명했다. 신체적 이점이 남자에 가까우니, 남자들과 경쟁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