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루한 앨’로 불린 남자는 탁월한 강연가가 돼 있었다. 어쩌다 미국 대선에서 졌는지 의아할 만한 솜씨였다. 영상과 통계를 적재적소에 끌어들이며 명쾌한 메시지로 청중을 장악했다. 앨 고어(75)는 “기후 위기 앞에 우리에겐 ‘변화해야만 할까?’ ‘변화할 수 있을까?’ ‘변화할 것인가?’ 등 3가지 질문이 남아 있다”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 우리는 변화해야만 합니다. 지구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모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폭염, 홍수, 산불, 태풍 등 기후 위기는 악화할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예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2050년까지 ‘넷제로(Net Zero·탄소 중립)’에 도달한다면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예스’,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당신의 목소리로 싸우세요! 투표권으로 투쟁하세요!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 극심한 기상이변이 전 지구를 덮친 지금,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해 변화를 촉구하는 앨 고어의 모습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를 외치던 선지자 같았다. 그는 ‘서울 기후 리더십 양성 교육’ 참가를 위해 최근 방한했다. 기후 위기 비영리단체 ‘클라이밋 리얼리티 프로젝트(CRP)’의 글로벌 트레이닝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개최되기는 처음이었다. CRP는 기후 위기에 대한 즉각적 행동과 함께 글로벌 해결책을 촉구하기 위해 앨 고어가 설립한 단체다.
이날 킨텍스 강연을 앞두고 따로 만난 앨 고어는 “2001년 미국 백악관을 떠난 이래 선거에 나가 공직자가 되는 것 말고도 공익을 추구할 방법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혼신의 힘을 다해 ‘불편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애쓸 때, 그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도울 때, 내가 1976년 처음으로 유세를 다녔던 시절의 기분을 다시 맛보곤 한다”고 말했다.
◇아들의 교통사고 후 환경 최우선 순위로
앨 고어는 이제 미국 부통령이라는 전직(前職)보다 환경 운동가라는 현직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연방 하원 의원(1977~1985년)을 시작으로 상원 의원(1985~1993년), 클린턴 행정부 부통령(1993~2001년) 등 20년 넘게 정치인으로 일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2000년 미 대선에서는 전국 득표에서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져 재검표 논란이 일었지만 ‘깨끗한 승복’ 연설로 화제가 됐다.
앨 고어는 정치 바깥에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찾았다. 환경 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2006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에 출연했고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그 공로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환경 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라면.
“1989년 4월 화창한 봄날이었다. (전 아내) 티퍼와 여섯 살이던 막내아들 앨버트를 데리고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친구를 따라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아들이 달려오는 차에 부딪혔다. 부모로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들은 크게 다쳤지만, 감사하게도 한 달 뒤 전신 깁스를 한 채 퇴원했고 몇 달 후 완치됐다. 그 사건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아들의 교통사고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새로운 시각으로 인생을 돌아보며 ‘진짜 중요한 건 무엇일까?’ 나에게 물었다. 숙고의 시간을 가지고 보니 환경 문제를 다른 모든 관심사보다 우선순위에 놓게 됐다. 아들의 회복기 중에 첫 책 ‘위기의 지구’를 쓰기 시작했다. 강연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하버드대 재학 시절부터 지구온난화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1968년 고(故) 로저 레벨(Revelle) 교수의 과학 강의를 들었다.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측정을 최초로 제안한 과학자다. 레벨 교수는 하와이 화산 꼭대기에서 매일 대기 샘플을 수거해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했다. 태평양 한복판을 고른 이유는 주변에 산업 단지가 없어 공기 오염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칠판에 그렸던 그래프가 담고 있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어떤 메시지였나.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추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 그래프에 불편하지만 분명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레벨 교수는 인류 문명이 밟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위험 신호를 무시할 경우, 그 길은 곧 재앙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강의실에서 처음 마주친 진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애쓰고 있다.”
-어떤 정치 칼럼니스트는 ‘앨 고어는 미래의 민주당 승리를 위해 기후 위기 이슈를 선점하려 했다’고 평가절하했다.
“전혀 아니다. 그의 억측일 뿐이다.”
-왜 억측인가?
“나는 공직에 있는 동안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뒤, 의회 최초의 지구온난화 청문회를 열어 레벨 교수를 1번 증인으로 초빙했다. 동료 의원들도 나처럼 깨달음을 얻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사안이 얼마나 급박한지 그들은 감지하지 못했다. 상원 의원이 돼 이산화탄소 방출량 통제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을 때도 어김없이 실패했다. 부통령이 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의회에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대담한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설득할 때도 그랬고, 상원을 상대로 교토 의정서 비준을 설득할 때도 계속 벽에 부딪혔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앨 고어는 빌 클린턴 대통령 행정부에서 ‘실세 부통령’으로 불렸다. 환경과 IT 산업, 통신 정책 등을 전담했다. 그는 ‘정보 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라는 용어도 만들었다. 30여 년간 상원 의원으로 재직한 아버지 앨버트 고어 시니어가 1956년 발의한 ‘고속도로 건설 지원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정보 초고속도로는 오늘날의 인터넷으로 발전했다.
앨 고어가 무엇보다 관심을 쏟은 분야는 환경이었다. 그는 교토 의정서 창설을 주도했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여섯 종류의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고,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 국가에는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방법으로 외국 상품을 차별하는 규제)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의정서는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지구온난화 방지 교토 회의 제3차 당사국 총회(COP3)에서 채택됐다.
-교토 의정서는 정작 미국에서 외면당했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를 탈퇴한 2001년에는 나를 누르고 당선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개발도상국이란 이유로 빠진 중국과 인도를 비롯해 온실가스 배출에 큰 책임이 있는 국가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교토 의정서에 불만을 품은 캐나다가 2011년, 일본과 러시아가 2012년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 탈퇴를 선언했을 때 기분은.
“부시 대통령은 이산화탄소 방출을 억제하겠다던 선거 공약을 취임 일주일 만에 뒤집었다. 유권자들을 속인 셈이다. 클린턴·고어 정부 시절에는 환경 정책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정부 교체 이후 우리가 이룬 것들이 다 망가지는 것을 안타깝게 목도했다. 부시는 ‘대통령이 된 뒤 다시 보니까 지구온난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문제로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후 위기를 믿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내 누이 낸시는 열세 살에 담배를 배웠다. 우리 가족 농장에서 담배를 재배했다. 1960년대 미국 공중위생국장이 ‘흡연이 폐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담배 회사들은 총력을 기울여 믿지 말라고 설득했다. ‘흡연이 폐암의 원인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뭉개려 했다. 담배 회사들이 동원한 기만적인 전략은 오늘날 석유·석탄 회사들에 그대로 전해졌다. 작은 불확실성을 과장해 큰 결론까지 문제가 있는 듯 속이고 있다. 과거 담배 회사들이 쓴 수법처럼, 현재 석유·석탄 회사들이 지구온난화에 대해 쓰는 전략도 부도덕하다. 오늘날엔 21세기 최고의 과학자들이 지구온난화를 경고하고 있다.”
-누이는 어떻게 됐나.
“1983년 폐암 진단을 받았고 1984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배를 재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옳은 판단을 내리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가정을 해보자. 만약 앨 고어가 승복하지 않고 재검표를 실시했다면, 그래서 조지 W 부시가 아닌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됐다면, 미국이 교토 의정서를 탈퇴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기후 위기가 지금보다는 덜 심각할까?
“윈스턴 처칠은 ‘미국인들은 모든 대안을 다 써버린 다음에야 옳은 일을 한다’고 말했다. 하하. 연방 대법원이 재검표 중지 판결을 내린 뒤에는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는 조지 W 부시에게 석패했다. 국민투표에서는 5100만표(48.4%)를 획득하며 부시를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271대266으로 부시(5046만 표·47.9%)에게 뒤졌다. 미 대선에서는 국민투표보다 선거인단을 더 많이 획득한 후보가 승리한다. 특히 플로리다주에서 앨 고어는 불과 2700여 표 차로 패배했지만, 일부 선거구에서 수작업 재검표 결과 400여 표 차까지 줄었다. 주 전체에서 재검표를 실시할 경우 결과가 뒤집혀 선거인단에서 역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공화당 성향 판사들이 주도한 미국 연방 대법원이 재검표 중지 판결을 내렸다.
앨 고어는 즉시 패배 인정 연설을 했다. 더 이상의 혼란과 분열을 막겠다며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150여 년 전 스티븐 더글러스가 선거에서 패한 뒤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당파성은 애국심에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지지합니다, 대통령”이라고 한 일화를 인용한 그의 승복 연설은 세계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가 불복하자 앨 고어의 깨끗한 승복이 다시 주목받았다.
◇“한국, 기후 위기 해결 주도해야”
앨 고어는 “한국이 기후 위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손주들이 음악을 틀면 어김없이 K팝이 흘러나온다. 한국은 전 세계에 영감을 주는(inspiring) 나라다. 어렸을 때 ‘비틀스’ ‘롤링 스톤스’ 등 영국 밴드들이 전 세계를 휩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 연상될 정도다. 가만, 한국 (윤석열) 대통령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웃음)?”
-음악·영화·드라마 등 ‘소프트파워’만으로 기후 위기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한국은 전쟁의 폐허와 빈곤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다. 가장 혁신적인 하이테크 국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와 잠재력을 감안하면 기후 위기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맡아 영감을 주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자동차·반도체 등에서 효율을 중시해 왔기 때문에 ‘탄소 중립’을 향한 여정을 더 효과적으로 이끌 수도 있다.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세계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매력을 더해주는 ‘금상첨화’다.”
-한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 고문이라면 어떤 조언을 하겠나.
“우선 석탄 발전을 가능한 한 빨리 중단하라고 권고하겠다. ‘공이 있는 지점이 아니라 공이 있을 지점으로 달려가라’는 말이 있다. 에너지 정책에 적용하면, 태양광과 풍력 발전에 투자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대기 오염이 없는 친환경일 뿐 아니라 앞으로 가장 값싼 전력 생산 수단이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향후 5년간 전 세계 신규 발전설비의 90% 이상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40년 유럽에서 원자력(메가와트시당 110달러), 가스(115달러), 석탄(145달러) 발전을 제치고 해상 풍력·태양광(65달러)과 육상 풍력(85달러)이 가장 저렴한 발전원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원자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고 있다.
“원전은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현재 태양광·풍력 발전 비용이 가스 발전 비용보다 저렴하지 않은 매우 드문 나라다. 하지만 장차 떨어질 것이다. 반면 한국은 원자력 발전 시설 생산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적다. 다른 국가들에서 원전 대신 태양광·풍력 발전으로 전환하는 건 경제적 이유, 즉 저렴하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다른 상황과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모든 것을 감안해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기후 위기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단계로 넘어갔다며 절망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기후 위기를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한 ‘넷제로(탄소 중립)’에 도달한다면, 지구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있다. 유엔 관련 기관인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많은 연구 끝에 최근 전망을 수정했다. 과거 IPCC는 넷제로에 도달하더라도 기온은 계속 올라갈 것으로 봤다. 온도가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기후 재앙이 멈춘다는 건 아니다. 빙하와 만년설은 계속 녹고, 기상이변도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있다는 가능성은 긍정적이고 고무적이다. 넷제로를 꾸준히 유지한다면,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 총량의 절반이 짧게는 30년 안에 대기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럼 우리는 긴 회복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 답변은 ‘예스, 우리는 기후 위기를 되돌릴 수 있다’이다.”
-지구가 신음하고 있다고 말해봤자 대중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비유보다는 확고부동한 숫자와 그래프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10년 주기로 9%씩 북극이 녹는다. 20세기 중반부터 북반구의 여름은 78일에서 95일 이상으로 늘어났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희망은 있다. 당장 행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