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에 제행무상(諸行無常·삼라만상은 늘 변화한다)이 있듯이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한 스님이 게시글을 남겼다. 화엄사에 소속된 1993년생 승려. 법명은 범정(凡鼎)이지만 인스타그램 아이디 ‘꽃스님’(kkochsnim)으로 더 유명하다. 눈에 띄는 수려한 외모로 이목을 끌었고, 자신의 사진과 활동을 열심히 인스타그램에 올린 결과 화제몰이에 성공했다. 팔로어 2만7000여 명. 최근에는 팬클럽 ‘꽃보살즈’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지난 5일, 꽃스님이 참여하는 화엄사 야간 사찰 탐방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자리가 동났다. 팬덤 효과 덕분이다. 한 불자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인스타그램까지 다 하시고, 이렇게 대중 속으로 가까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산중 면벽 수행은 옛말?
변화하는 불교의 현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스님이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자주 찍어 올리거나, 개그맨 홍석천 등 유명인이 이를 팔로하는 모습은 낯설다. “수행만 해도 모자랄 스님이 인스타그램?” “속세 벗어나려고 스님 된 것 아니었어?” 부정적 반응도 상당수다. 진해기지사령부 군종장교로 복무 중인 꽃스님은 불교신문 인터뷰에서 “스님들조차 ‘스님이 그래도 되느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던질 때가 있다”면서도 “불교를 시대에 맞게 디자인하고 한 걸음씩 전진해나가는 게 MZ세대 스님들의 포교 방식 아닐까”라고 했다.
“땡중 아니냐”는 거친 반응부터 “스님은 이름도 향기도 없이 참된 고행에서 얻은 진리로만 길을 열고 가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그럼에도 인스타그램을 두드리는 스님은 늘어나는 추세. 때로 유튜버를 겸하기도 한다. 일상의 사진과 단상, 위로가 되는 법문(法文) 등을 공유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IT 기업 퓨처월드포는 아예 메타버스로 ‘가상 사찰 미륵사’를 제작하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아바타 스님 등을 앞세워 언제든 어디서든 신앙 생활을 유도하자는 취지였다.
◇포교 없이는 종교도 없다
불교는 2015년 통계청 ‘종교 인구 조사’부터 국내 2위로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무종교 인구가 종교 인구를 추월했다. 신자 감소는 종교의 존재 근간을 흔든다. 적극적인 포교를 위해 조계종 측이 최근 사단법인으로 설립한 상월결사(이사장 자승스님)는 대학생전법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지난 5일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도 인스타그램은 주요 화제였다. “대학생들은 감성을 중시하는 만큼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고 서로 공통 관심사를 늘려가면 불교와 가까워질 것”(윤소연 전 동국대 불교학생회장) 등의 조언이 쏟아졌다.
지난해 서울 홍대 앞에 문을 연 불교 명상 게스트하우스 ‘저스트 비 템플 홍대선원’은 변화와 성공의 대표적 증거다.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돼 찾아오는 외국인과 대학생이 매달 300명에 달한다. 이곳을 세운 미국 유학파 출신 준한(45) 스님은 “불교도 즐거워야 한다”며 “다른 문화와 세대가 섞일 때 활력이 생기고 더 넓은 포교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는 ‘포트럭’(potluck)이나 댄스와 다선(茶禪)을 결합한 문화 행사 등을 주기적으로 열고, 이를 인스타그램으로 확산한다. 준한 스님은 “인스타그램으로 출가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렇게 한 40대 불자가 얼마 전 출가해 암자에서 수행 중”이라고 말했다. 홍대선원은 판교·용인 등으로 확장을 논의 중이다.
◇‘셀럽 승려’의 배신
그러나 양날의 검이다. ‘혜민스님’으로 알려진 승려 주봉석(50)씨가 이달 초 인스타그램 활동을 재개했다. 이른바 ‘풀(full) 소유’ 논란 이후 3년 만이다. 소셜미디어에서 검소한 행복을 주창하며 인기를 끌었으나, 재력과 세속에 대한 강렬한 의욕이 탄로나면서 불가의 부정적 인식을 가속화한 사건이다. 팔로어는 12만6000여명이지만, 주씨의 해당 게시물에 달린 댓글은 5개에 불과하다.
카이스트 졸업생 ‘도연스님’으로 활동한 최현성(37)씨는 방송 출연 및 저술 활동과 더불어 인스타그램에 가수 임영웅의 노래 커버 영상을 올리는 등의 대중친화적 행보로 세속의 박수를 받았으나, 출가 후에도 자식을 낳고 이를 숨겼다는 폭로로 치명타를 입었다. “머리 민 거 빼고 장사꾼과 다를 게 없네” 등의 반발이 들끓고 불교 전반의 불신으로 비화되자, 결국 최씨는 환속(還俗)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