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느 골목마다 은박지에 싸서 파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박한 그 맛. ‘…을 먹었다’보다 ‘…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천국’이란 접미어를 붙여도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 한 줌의 식사. 김밥이 미국을 홀렸다.
현재 미국 각지에선 한국 김밥을 구하느라 난리다. 지난 8월 초부터 한국산 냉동 김밥을 직수입해 파는 식품점 체인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선 전국 42개 주 560여 개 지점마다 물량이 한 달도 안 돼 동났다. 김밥 수백 만 줄 분량의 250t 규모 초도 물량이 완판됐다. 경북 구미의 중소 식품업체 올곧이 만들어 납품한 이 냉동 김밥의 제품명은 김밥의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딴 ‘KIMBAP’이다.
◇냉동 김밥이 완판됐다
이미 8월 중순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에 “제발 KIMBAP을 그만 사달라”는 호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매일 김밥 사러 트레이더 조에 가는데 그때마다 품절돼 맛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밥 보릿고개’를 겪고 있는 9월도 소셜미디어나 지역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이 냉동 김밥을 어느 동네에 가면 살 수 있는지, 지점별 재입고 시기가 언제인지에 관한 정보들이 실시간 공유되고 있다. “텍사스엔 9월 말 다시 들어온대” “캘리포니아는 10월에나” “버지니아 트레이더 조는 11월, 흑흑” 같은 식이다.
NBC와 CBS 같은 미 공중파 방송사들도 김밥 열풍을 보도했다. 틱톡·인스타그램 등에선 한국산 냉동 김밥을 전자레인지에 2분10초간 데워 먹어보고 찬사를 쏟아내는 영상이 매일 올라온다. 계란물 입혀 구워 먹기, 떡볶이나 컵라면·불닭볶음면과 함께 먹기 등 다양한 방법을 추천하는 영상도 있다.
한국계 음식 블로거인 사라 안(27)과 어머니가 운영하는 인스타 계정 ‘아니스트 키친’에선 모녀가 “김밥을 얼려 판다고?”라며 어리둥절해하다 “괜찮다(not bad)”고 평하는 영상이 1200만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에 불을 붙였다. KIMBAP을 먹어본 다른 미국 내 한인들은 “보통 김밥에 비해 달다” “김밥 ‘꼬다리’가 없어 아쉽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
냉동 김밥의 신세계에 눈뜬 미국인들은 한인 슈퍼마켓 체인 H-마트나 한국 분식집 등에서 현지인들이 만들어 파는 즉석 김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트레이더 조에서 3.99달러(5300원)에 파는 냉동 채소김밥과 달리, 신선 김밥은 속재료에 따라 7~15달러(9300~2만원) 선이다. 여기에 세금과 팁까지 붙으면 우리 눈엔 더 이상 김밥이라고 하기 뭣한 가격으로 올라간다. 그런데도 내놓는 족족 팔려나간다고 한다.
미 매체들은 “사느라 고생하지 말고 만들어 먹어 보자”며 김밥 조리법을 앞다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김밥이 먹기나 간편하지, 어디 만들기 간편한 음식이던가. 일일이 재료 다듬고 양념에 재워 조리고 볶고 초밥 지어 깔고 안 터지게 말아 깔끔하게 썰어내는 공정을 알고 나면 김밥에 대한 경외감과 환상만 커질 뿐이다. ‘시금치 무침(sauted greens),’ 우엉·당근 등 ‘아삭한 뿌리채소(crunchy root vegetables),’ ‘단무지(crisp pickles)’ ‘유부(braised tofu)’ ‘참기름(sesame oil)’ 같은 재료명은 고급 채식 레스토랑의 메뉴 묘사를 방불케 한다.
◇美 건강식 열풍 타고
김밥 열풍은 한국의 대표 글로벌 음식으로 자리 잡은 김치·비빔밥·불고기의 세계화 과정을 단기간에 압축해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미국인들은 김밥을 일본식 초밥(스시)이나 미국화된 스시인 캘리포니아롤과 구분하지 못했다. ‘코리안 스시’로 불리던 김밥이 제 이름 그대로 불리며 인기를 끌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미 대도시 중심으로 유행하는 건강식·채식(vegan) 열풍에 딱 들어맞는다. 잎채소와 뿌리채소, 밥 등으로 속을 꽉 채우고 해조류인 김으로 싼 김밥은, 월남쌈이나 캘리포니아롤과 비슷하지만 식물성 재료의 종류가 더 다양하게 망라돼 있고 공도 훨씬 많이 들어간다. 미국에 납품된 올곧의 냉동 김밥은 수출 통관이 까다로운 햄·계란 등 동물성 재료를 배제하고 간장 양념된 유부, 잡채 등을 넣었다.
김밥은 속재료를 기호대로 넣어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한 주문제작(customize) 식품이다. 특히 휴대가 편하고 한입에 쏙 넣을 수 있다는 점도 젊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끈다. 다른 한국 음식처럼 부피가 크거나 특유의 냄새가 많이 나거나 젓가락·접시 등 별도의 식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등의 불편이 없다.
요즘 미국에선 외식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팁까지 오르는 ‘런치플레이션(lunch+inflation)’ ‘팁플레이션(tip+inflation)’ 때문에 식당을 기피하고 테이크아웃 간편식이나 잘 조리된 냉동식품을 택하는 분위기다. 뉴욕 등지에선 샌드위치·햄버거나 푸드트럭 음식 등 직장인들의 점심 한 끼 비용으로 20~30달러는 우습게 나간다. 김밥은 영양과 가격이 모두 착한 ‘가성비 갑’ 음식으로 통한다.
올곧이 미국 판로로 택한 트레이더 조의 마니아층이 낸 입소문도 김밥 열풍에 한몫 했다. 한국이라면 ‘김씨네 잡화점’ 정도의 이름인 트레이더 조는 다양한 PB(자체 브랜드) 상품과 독특한 포장, 재미있는 마케팅,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모든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기업 문화 등으로 유명하다. 소금부터 시리얼, 아이스크림, 꿀, 선크림까지 신제품 출시 때마다 ‘오픈런’ ‘사재기’ 열풍이 불고, 트레이더 조 전용 장바구니를 종류별로 사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튀르키예 케밥, 중국 딤섬, 일본 라멘 등 각국 음식을 보편적인 맛의 냉동식품으로 구현해 낸다. KIMBAP에 앞서 트레이더 조가 내놓은 한국식 LA갈비, 김치, 불고기 덮밥, 파전, 떡볶이, 떡국떡 등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우영우·문동은의 끼니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히트를 친 한국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파생시킨 의외의 인기 상품이 바로 김밥이란 말도 나온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박은빈)는 “재료가 한눈에 보여 놀라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김밥만 먹고 사는 인물로, 그의 아버지도 동네 김밥집을 운영한다. 학교폭력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도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이 김밥집에서 일하며 고학을 하고 복수의 칼을 갈면서 처연한 표정으로 김밥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김밥은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똑똑하고 정의롭고 검소하며 예쁘기까지 한 한국 히로인(여성 영웅)들의 끼니였던 것이다.
사라 안은 언론 인터뷰에서 “어릴 때 백인이 대다수인 학교에서 어머니가 싸주신 한식을 점심으로 먹을 땐 조롱당했는데, 이젠 사람들이 한국 음악과 음식 등 모든 것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뉴저지의 한 30대 한인 주부는 “초등학생 아이의 점심으로 김밥을 싸 보냈더니 친구들이 하도 부러워해, 생일 파티 메인 메뉴로 내놓기로 했다”며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인기에 미국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더라. 한국의 위상이 피부로 느껴진다”고 전했다.
미 NBC 뉴스도 김밥의 인기를 “K팝, K드라마 등 한국 문화의 인기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라고 짚었다. 한국인이 먹기 때문에, 한국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것에도 매력을 부여한다는 얘기다. 김밥의 인기를 이어받을 다음 타자는 무엇일까. 우리 것을 열심히 만들어 즐겁게 먹고 즐기면, 곧 글로벌 트렌드가 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