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성을 지키시오.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당신이 직접 나서도록 하시오.” 1945년 8월 17일, 패전 이후 구성된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첫 각의(閣議) 직후,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이 경시총감에게 지시했다. 이튿날 경시청 보안과장은 도쿄 요리점 조합장들을 불러 “연합군 장병을 ‘위안’하기 위한 각종 시설을 설치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했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8월 23일, 도쿄도 산하 접객업 7개 단체 주도로 ‘특수위안시설협회’(RAA)가 설립되었다. 5000만엔의 대출을 주선한 대장성은 민간에서도 비슷한 금액을 갹출할 것을 당부했다. 훗날 총리대신에 오르는 대장성 관료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데 1억엔이면 싼 것”이라 말했다. RAA는 도쿄도에 43개 시설(위안소 14곳, 카바레 9곳, 기타 병원, 여관 등)을 설치했다. 미군이 주둔한 20개 도시에도 비슷한 시설이 설치되었다.
패전 이후, 일본 군대가 점령지에서 ‘자행한 일’을 기억하고 있던 귀환 군인들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상륙하면 일본 여성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겁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RAA가 서둘러 조직된 것은 소수의 여성들을 모집해 선량한 일본 여성들을 지키는 “성(性)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서였다.
연합군 병사들은 RAA 위안소에 ‘만족’했다. 점령군 규모에 비하면, 일본에서 그들에 의한 성폭행 사건은 발생률이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RAA 위안소에 쇄도하는 미군 병사들의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미군 제8군 부대원의 70%가 매독, 임질 등에 감염되면서 한때 7만여 명의 여성을 고용한 RAA는 1946년 3월 폐쇄되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도 총독부 주도로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1945년 9월 10일,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3층에 ‘국제문화사’라는 호화로운 간판이 내걸렸다. 행인들은 대체 무슨 ‘문화 사업’을 하려고 저렇게 큰 공간이 필요한지 의아해했다. 얼마 후, 국제문화사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댄스홀이고, 경영주가 무용가로 명성을 떨치던 배구자임이 알려졌다. 배구자는 사별한 첫 남편 홍순언과 함께 ‘동양극장’을 운영했고,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를 자처하며 대한제국 때부터 일본의 밀정으로 악명이 높았던 배정자의 조카였다. 배구자가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국제문화사 실소유주는 배구자의 남편 김계조였다. 경남 김해 출신인 김계조는 14세 때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약주(藥酒) 회사를 설립해 큰 부를 쌓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1934년 귀국한 뒤 회문탄광, 동양연료주식회사 등을 설립해 석탄 업계 거물로 군림했다. 창씨개명 때 ‘나카무라 가즈오’로 개명한 것으로도 모자라, 동양연료 2000여 사원들의 성을 본인 동의 없이 모조리 ‘나카무라’로 창씨해, 동양연료가 ‘나카무라 회사’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제문화사를 둘러싼 총독부와 김계조의 음모는 1945년 9월 22일 ‘제보자’ 김정목이 윤명룡 변호사를 통해 미군 24군단 224방첩대(CIC)에 사건을 제보하면서 알려졌다. 핵심 내용은 총독부가 김계조에게 1000만원 자금을 제공하여 댄스홀, 기생집, 매음굴, 호텔 등을 설립하고, 이를 거점으로 미군 관련 정보를 수집, 이승만 등 반일 인사를 살해하고, 궁극적으로 미군을 축출하고, 한국에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총독부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니시히로 다다오 경무국장 등 총독부 수뇌부와 일본인세화회 회장 이하 주요 간부들이 줄줄이 CIC에 소환돼 신문을 받았다. 그 사이 미 군정이 한국인 판검사를 고용해 법원을 설치하면서, 윤명룡 변호사는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임용되었다.
12월까지 이어진 CIC 조사 결과, 김계조가 총독부 알선으로 200만원을 불법 대출받았고, 대출 과정에 총독부 정무총감, 경무국장, 재무국장, 광공국장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했으며, 니시히로 경무국장이 별도로 110만원의 비자금을 제공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김계조가 댄스홀을 설립한 목적과 정당·사회단체에 뿌린 비자금의 규모 등은 밝혀내지 못했다. CIC와 미군정 법무감실은 간첩예비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미군 군사재판으로 처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사건을 한국 검찰에 이첩했다. 공판은 1946년 1월에서 3월 사이, 8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공판 때마다 방청석은 초만원이었고, 특별방청석에는 미군정 법무국장과 CIC 관계자들이 자리했다.
‘제보자’ 김정목이 공범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건은 더 복잡해졌다. 김정목은 ‘황도(皇道) 철학’의 권위자로, 조선 청년을 이념적으로 선동해 전장(戰場)으로 내모는 데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엔도 정무총감의 추천으로 조선인 최초로 일본 문부성 교학관(敎學官)에 임명된 인연도 있었다. 김정목은 김계조에게 엔도 정무총감을 소개해주는 대가로 10만원의 소개료와 매달 2만원의 생활비를 받았다. CIC에 제보하기 전, 김정목이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 “사건을 제보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김계조는 “댄스홀 수익금의 3분의 1을 달라”는 윤명룡과 김정목의 요구를 거절하는 바람에 무고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CIC 제보 후 김정목은 김계조의 동생 김흥조에게 “구명하려면 재산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김흥조는 “윤명룡 부장판사의 집무실에서 김정목 등에게 자기 집안의 토지 목록을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김정목은 업무상횡령죄로 구속되었고, 윤명룡 부장판사의 고소로 김흥조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다.
김계조는 재판정에서 “건국을 방해하고자 한 음모는 없었다. 서울에 미군 오락 기관이 하나도 없으니 이대로 둔다면 조선 부녀자의 풍기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아 국제문화사를 만들고 댄스홀을 경영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증언했다.
현직 김용무 대법원장이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돼 김계조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등 공판은 성역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간첩예비죄의 증거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김홍섭 검사는 김계조에게 횡령과 장물수수 혐의로 징역 3년 추징금 310만원을 구형했다. 하지만 오승근 판사는 이례적으로 기소되지도 않은 간첩예비죄를 적용해 징역 5년에 추징금 310만원을 선고했다. 같은 해 10월 항소심에서 김우열 재판장은 “배임죄만 구성된다”며 김계조의 형(刑)을 징역 10개월로 감형했다.
재판 결과만 놓고 보면, 조선총독부는 “댄스홀을 설립해 조선 부녀자를 보호하겠다”는 김계조의 취지에 공감해 불법 자금을 제공한 셈이었다. 공감하기 어려운 결론이지만 “조선총독부가 댄스홀을 설립해 한국에 친일 정권 수립을 도모했다”는 김정목의 제보도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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