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이지만, 마음은 마냥 편하지 않다. 올 추석 차례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 젊은 부부를 중심으로 차례를 꺼리는 분위기가 커지면서 명절을 전후해 고부 갈등이나 부부 싸움이 갈수록 격해진다는 우려도 있다.
명절 차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 무조건 여러 말 말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주말’은 지난 1월 차례 간소화 표준안을 내놓은 성균관유도회를 찾았다. 최영갑(59)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회장은 “지난 번 발표한 차례 간소화 방안은 명확히 말하면 간소화가 아니라 엄연한 차례의 표준”이라고 강조했다.
성균관은 꽤 고지식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차례와 제사, 예법에 대해 최 회장은 시종일관 “이제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최 회장은 성균관대 유학과를 나와 공자와 맹자를 연구해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선진 유학 전문가다. 그는 “제사에 준하는 차례는 유교적 전통에 맞지 않으니, 유교 경전에 맞게 차례를 지내면 된다는 뜻”이라며 “유교 전통에 대한 제 소신을 누군가 비난한다면, 기꺼이 그 매를 맞을 각오로 말하겠다”고 했다.
<1>차례 표준안에 대해 다시 설명해 달라.
“일단 차례와 제사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자. 성균관유도회에서 제시한 차례 표준안은 과일 네 종류, 백김치, 구이(적), 나물, 송편(또는 떡국), 술 이렇게 아홉 가지를 차리는 것이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음식 놓는 방향이나 순서를 굳이 따지지 않고 상에 차려도 괜찮다. 각자 형편과 사정에 따라 표준안보다 음식을 더 올려도 되고, 덜 올려도 된다. 전 안 부치셔도 된다. 형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정화수만 떠놓고 차례를 지낼 수도 있다.”
<2>간소화된 표준안이 발표되니 “간소하게 차리면 정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도 있었다.
“차례를 제사에 준해서 지내는 관행이 퍼져 있는데, 그게 왜곡된 관습이다. 우리나라 모든 예서의 기본은 주자가 예법과 의례를 정리한 ‘주자가례’다. 그런데 주자가례는 차례에 대해 ‘계절에 나는 과일, 음식을 올리라’ 정도만 언급하고 있다. 제사는 어떤 음식을 어떻게 차리는지 세밀하게 적어둔 것과 대조적이다. 저희가 제시한 표준안대로 하는 것이 유교, 주자가례에 더 부합한다고 명확히 말씀드린다.”
<3>그럼 차례상엔 꼭 제철 과일, 제철 음식을 올려야 하는 건가?
“예전에는 과일이 철에 따라 났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지 않나. 제철을 꼭 따질 것 없이 조상이 드실 과일, 음식을 놓으면 된다. 형식을 따지고 싶다면 술, 과일, 포 세 가지는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4>차례상에 피자, 스파게티, 와인 같은 외국 음식을 올려도 상관없나?
“지금도 우리 밥상을 보면 60~70%는 외국산이지 않나. 요즘 문중 제사에 가보면 수박, 바나나, 포도도 올라온다. 차례와 제사 구분 없이 치킨, 피자 같은 것을 올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젊은 세대나 어린이들이 제사나 차례를 더 반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어떤 집안에 가보니 젊은 사람들을 제사에 부르려고 퀴즈 내고 상품권 추첨하고 상금도 주고 하더라. 어린이들, 젊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경건해야 할 때는 경건하게 하고 그게 끝나면 가족끼리 이런 방식으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올바른 제사 문화라고 본다.”
<5>차례상에 올리면 안 되는 음식은 없다는 말인가?
“가령 복숭아 같은 과일은 귀신을 쫓는다는 생각으로 금지된 적이 있다. 그리고 생선 중에 꽁치, 갈치처럼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올리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표준안을 통해 차례 준비의 부담이 줄었는데, 굳이 이런 것들을 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6>그동안 며느리들이 고생했는데, 표준안이 왜 늦게 나왔는지 의아하다.
“올해 초 발표할 때 ‘그간 고생하신 며느님들 너무 늦어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명절에 가족이 잘 모이지도 못하다 보니 차례를 지내는 집이 크게 줄었고, 이대로 가면 정말 차례라는 전통이 아예 사라지겠다는 위기감도 있었다. 막상 검토를 해보니 가장 간소한 예가 차례였다.”
<7>차례를 힘들게 지내 온 시어머니들은 억울하거나 야속한 마음도 들 것 같은데.
“시어머니들이 차례, 제사 때 겪은 수고와 고통을 새로 가족이 된 며느리가 좀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건 일종의 고통 대물림이다. 학교에서 내가 선배한테 맞았으니 후배 들어오면 내가 또 때리겠다고 하면 되겠나. 내가 불편한 거라면 대물림을 안 하는 게 옳다. 내가 차례, 제사로 힘들었다면 다음 세대에는 그런 부담을 적게 물려주고,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8>추석, 설 중 하루만 골라 차례를 지내는 집도 있다는데 괜찮은가?
“명절에 맞춰 차례를 지내는 게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지만 예라는 것은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올해는 추석에 차례 지내고 내년 설에는 같이 여행 가자’라고 가족이 합의하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고, 막을 수도 없다. 외국에 여행 가서 차례 지내면 귀신은 미국도, 유럽도 다 따라갈 거라고 저는 생각한다. 귀신은 막히는 데가 없지 않나. 명절마다 공항에 해외여행 인파가 몰리는데, 그 사람들 다 욕할 텐가. 그건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한 태도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는 저를 비난할 수 있지만, 할 말은 하고 비난은 감수하겠다.”
<9>젊은 세대 중에 ‘왜 차례나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서양은 태어난 날을 중시하는 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은 돌아가신 날을 중시하는 문화다. 차례나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기리면서,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 가족이 모여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전통이다. 추석이나 설에 힘들게, 교통 체증 겪으며 모이는 것도 합리적이진 않지만 다 가족을 위해 그러는 거 아닌가. 다만 지금 차례나 제사의 전통이 젊은 사람들에겐 어렵고 생소한 부분이 많으니 어른들이 좀 쉽게 만들어주면 좋을 듯하다.”
<10>’왜 차례, 제사 준비를 여자만 하느냐’는 불만도 커졌다.
“옛날 전통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됐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지금은 4차 산업 사회로 가고 있고, 남녀 역할의 구분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니 정말 제대로 된 남성이라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음식도 같이 하고 설거지도, 상차림도 다 같이 하는 게 맞는다. 만약 지금 어떤 집안에서 차례, 제사 준비를 여성에게만 시킨다면, 그건 유교적 전통을 따르는 게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관습을 고집하는 것, 개인의 인격 문제라고 분명히 말씀드린다. 집안 어른 중에 상차림을 지적하면서 차례나 제사를 마치 본인의 권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11>차례, 제사를 지내느냐 마느냐로 다툼이 많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일로 가족 간에 불화나 다툼이 생긴다면 차라리 지내지 않는 편이 낫다. 조상을 모시고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전통인데 가족 내 싸움을 낳는 건 안 될 일이다. 형식을 지배하는 근본정신이 바르게 서야 올바른 차례와 제사가 되는 것이다. 전통과 풍습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 요즘 종갓집들도 ‘예전처럼 제사 지내면 대가 끊어진다’는 위기감에 제사를 합치고 줄인다. 시대적 요청이다. 어른들이 다음 세대가 제사나 차례를 지낼 수 있게 편하게 해주고,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
<12>제사를 꼭 밤에 지내야 하는지?
“요즘에는 밤에 제사를 지내기 어렵다. 밤에 지내면 새벽이 되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다음날 어떻게 출근하나. 그래서 오후에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종갓집도 요즘엔 오후 6~7시에 다 지낸다. 원칙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생활을 이어가려면 이렇게 가야 된다.”
그렇다면 제사도 차례처럼 간소화할 수 있을까. 최영갑 회장은 “차례와 달리 제사는 주자가례를 비롯한 여러 예서에 음식의 차림과 방식 등이 명확하게 언급돼 있어 이를 줄이거나 정리하는 게 만만치 않고 훨씬 어려운 일”이라며 “이르면 다음 달에 현 시대에 맞고 유교 전통에도 부합하는 새로운 제사 표준안을 발표하려고 내부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