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의 길이가 다시 같아지는 절기, 추분이다. 서늘한 바람이 일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해지는 이즈음이면 물고기들은 벌써 월동 채비를 시작한다. 살을 찌우는 일이다. 민물이든 바다든 물고기들이 대개 초가을부터 제 맛이 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추어(鰍魚)라는 한자 이름을 가진 미꾸라지만큼 이 계절을 강렬하게 연상시키는 물고기는 드물다. 전적으로 양식에 의존하며 제철 개념이 희미해진 지 오래지만, 물 빠진 논과 개울에서 미꾸라지들이 꿈틀대는 이맘때면 추어탕을 찾는 식객들이 부쩍 는다. 마침 미꾸라지는 문어와 함께 해양수산부가 매달 선정해 발표하는 ‘이달의 수산물’이기도 하다.
잉어목 기름종갯과에 속하는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모양도 맛도 살짝 다르다. 미꾸리는 몸통이 둥글둥글해서 ‘둥글이’로 불리고, 미꾸라지는 세로로 납작해서 ‘납작이’로 불린다. 맛은 토종 미꾸리가 낫지만, 성장 속도가 빠른 양식 미꾸라지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곤란한 상황을 요리조리 회피하는 이들을 미꾸라지에 비유하지만 억울한 일이다. 미꾸라지만큼 적응 능력이 뛰어난 물고기도 드물기 때문이다. 3급수에서도 탈 없이 지내고 산소가 부족하면 내장으로 호흡하는 미꾸라지는 가성비가 좋은 영양 공급원이다.
내 고향 남원에는 추어탕 재료들이 흔하다. 넓은 평야를 실핏줄처럼 가로지르며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에서는 미꾸라지가 자라고, 지리산 너른 자락에는 푸성귀가 널려 있다. 물론 재료가 흔하다고 절로 음식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현재 남원 추어탕의 전국적인 명성은 1959년 서삼례 할머니가 창업한 ‘새집추어탕’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번듯한 건물과 별관까지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긴 세월을 함께한 새집의 추어탕(1만2000원)은 남원의 자랑이다. 탕에 적합한 15㎝가 넘는 큰 미꾸라지 대신 뼈가 연한 미꾸라지로 조리하는 미꾸라지깻잎말이튀김이나 숙회도 비린내 없이 고소하다. ‘부산집’이나 ‘현식당’ 등 시민들의 고른 지지를 받는 추어탕 전문점들은 대부분 새집과 광한루 사이에 몰려 있다.
미꾸라지는 한반도 전역에 두루 서식하는 민물고기이다. 논과 하천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산과 들에서 채취한 시래기, 고사리, 푸성귀와 함께 끓여내는 추어탕은 어느 지역에서나 흔한 탕 요리이다. 지금은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 얼큰하게 끓여내는 남원식 추어탕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조리법과 재료가 제각각인 다른 지역 추어탕의 자리도 여전하다.
서울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끓이고 국물은 육개장처럼 붉은빛이 감돈다. 1932년에 개업한 자하문로 ‘용금옥’은 현재 거의 유일하게 이런 서울 추탕을 맛볼 수 있는 백년 노포이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통추어탕이 기본인 원주식 추어탕은 버섯, 감자, 미나리가 들어가고 국물은 매운탕에 가깝다. 경상도 전역에서 내는 추어탕은 고추를 섞지 않고 된장으로 기본 맛을 낸 담백한 국물이 특징이다. 향 짙은 방아 잎을 듬뿍 넣어 먹는 방식도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렵다.
추석 같은 명절이나 가족 행사가 있는 날이면 고향집 앞마당에는 가마솥이 내걸린다. 가족이 함께 먹을 추어탕을 끓이기 위함이다. 팔순이 넘은 노모는 아직도 추어탕을 손수 끓이신다. 남원 시장 단골집에서 미리 사다 놓은 미꾸라지를 굵은 소금을 풀어 해감하고, 호박잎으로 닦고 된장기와 함께 삶아낸 미꾸라지를 돌확에 갈아 뼈를 제거하고, 불을 조절해 가며 적절한 타이밍에 시래기와 된장과 간 고추, 들깨, 생강, 마늘을 넣고 간을 보는 일까지 다른 가족의 도움을 내치고 직접 하신다.
이번 추석에도 노모는 추어탕을 한 솥 끓이실 터이다. 노모의 추어탕 조리법을 영상에 담아볼 생각이다. 긴 세월 동안 내 몸을 살찌우고 영혼을 위로해준 이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