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백제로의 시간 여행’을 계획한다면 지금이 ‘제철’이다. 바로 오늘(23일)부터 10월 9일까지 공주와 부여에선 ‘대백제전’이 그야말로 떠들썩하게 열린다.
대백제전은 1955년 ‘백제 대제’를 시작으로 매년 가을 개최해 온 ‘백제문화제’에 ‘무령왕 서거 및 성왕 즉위 1500주년’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이라는 의미를 더한 대규모 행사다. 대백제전이라는 이름으로는 2010년 세계 대백제전 이후 13년 만이다. 축제가 열리는 열이레 동안 공주와 부여 두 도시의 주요 공간에선 공연·전시·퍼레이드·미디어아트 쇼 등이 날마다 펼쳐진다. “백제 역사 문화를 만나고 즐기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당분간 없다”는 게 김성철(55) 대백제전 총감독의 말.
축제의 주 무대가 될 공주 ‘금강신관공원’, 부여 ‘백제문화단지’ 일대를 포함해 백제의 향기에 흠뻑 취해볼 만한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두 도시를 오가는 동안 1500년 전 백제로 순간 이동했다.
◇‘백제의 시간’ 흐르는 금강
푸르스름한 빛과 노을이 엉긴 하늘 아래 공주 금강 미르섬 주변의 황포돛배 모형에 하나둘 불이 켜진다. 잔잔한 듯 이따금 일렁이는 물결과 불어오는 바람에 배 수십 척이 살랑살랑 춤을 춘다. 해상 강국 대백제를 주제로 한 ‘웅진 백제 등불 향연’ 조형물의 불빛까지 더해지는 순간, 수수한 풍경의 금강은 모처럼 화려한 빛을 입고 주인공이 된다.
금강은 백제의 역사가 흐르는 강이다. 백제인들에게는 젖줄이자 생명수였고, 백제의 부흥과 패망을 가져온 물길이기도 했다. 공산성·송산리 고분군·부소산성·정림사지·미륵사지·왕궁리 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금강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공주, 부여’ 등을 펴낸 사학자 신정일 우리 땅 걷기 이사장은 금강을 두고 “백제 흥망성쇠의 눈물이 녹아든 강이자 백제부터 근현대까지 시간 여행의 중심축”이라고 했다. 이 중심축은 15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다. 올해 대백제전 ‘공주 편’의 주 무대는 금강 금강신관공원에 들어섰다. 개막식과 폐막 세리머니를 비롯해 웅진 백제 등불 향연, 수상 멀티미디어 쇼 등 굵직한 행사가 금강신관공원 일원에서 펼쳐진다.
◇금강 전망대 두 곳
공주에서 금강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는 ‘공산성’에 있는 ‘공북루’ 주변이다. 공산성은 백제 웅진 시기(475~538년)에 축조된 성. 해발 110m 나지막한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형태의 성곽은 총둘레가 2400여 m다. 공산성 입구인 ‘금서루’ 부근 매표소에서 시작해 공북루까지 ‘산성 공원’을 거치는 지름길을 택하면 10분, 금서루에서 성곽 길을 따라 걸으면 20분쯤 걸린다. 오르락내리락 변화무쌍한 코스지만, 금강과 공주 시내 풍경을 사방으로 둘러보고 싶다면 성곽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재미있다. 한 바퀴 돌아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공산성은 ‘웅진 백제’ 이후에도 사비 백제 시기 의자왕이 피신한 거처이자, 임진왜란 후 충청감영이 설치된 곳이자, 인조가 이괄의 난 때 잠시 머물기도 한 역사적 공간이다. 성 안엔 백제 연못인 ‘왕궁지’ ‘공산성 연지’ ‘임류각지’ 등 터와 ‘영은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금강의 장엄한 풍경은 공산성과 금강신관공원에서 10여 ㎞ 떨어진 청벽산의 절벽 ‘창벽’에서 만날 수 있다. 창벽은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 사이에서 ‘비단 같은 강’ 금강의 비경 전망대 중 으뜸으로 꼽히던 곳. 비경을 만나기 위해선 약간의 등산이 필요하다. 젊은 층이 주로 하는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엔 ‘15~20분 정도 오르면 되는 난도 하 코스’라고 조용히 소문나고 있지만, ‘청벽가든’ 부근 초입부터 전망대까지 평지는 없고 경사가 심한 편이다. 난간처럼 설치한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구간도 있다. 체감상 난도 중급 이상이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땀 뻘뻘 흘리며 오르고 나면 ‘고진감래가 이런 것이구나’ 실감할 만큼 금강의 아름다운 곡선이 절벽 아래로 펼쳐진다. 신정일 이사장의 표현으로는 “활을 반쯤 당긴 듯한 곡선의 강”이다. 멀리 금강의 물줄기 끝으로 지는 빛이 아름답다고 해 일몰 산행 명소이기도 하다. 해 진 뒤엔 손전등 없이는 하산 길이 만만치 않으니 참고하자.
대백제전 공주 주 행사장은 금강신관공원이지만, 금강 여행에서 고마나루를 지나치면 아쉽다. 부여의 ‘구드래 나루터’와 함께 수운이 중심이던 웅진·사비 백제 시대 대표 금강 나루터 중 하나였다. 고마나루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무꾼의 아내로 살다가 나무꾼이 떠난 뒤 강물에 몸을 던진 암곰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곰나루’라고도 불렸던 고마나루 강변에는 ‘곰사당’ ‘웅진단 터’ 등 이 전설과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다. 슬픈 전설은 전설일 뿐. 금강 변 따라 연미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고마나루 솔숲은 요즘 솔숲과 나란히 난 맨발 산책로가 때아닌 인기다. 산책로 입구에 신발을 벗고 맨발로 황톳길을 오가는 중·장년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인들과 맨발로 산책하던 시민 김형기(67)씨는 “지난여름 장마 때 황톳길이 많이 씻겨 내려가서 아쉽지만, 피톤치드 뿜어내는 솔밭 사이를 맨발로 걷다 보면 저절로 몸이 맑아지는 기분”이라며 걷고 또 걸었다.
◇1500년 전 ‘무령왕의 장례’
올해는 무령왕 서거 1500년 되는 해다. 무령왕(재위 501∼523)은 기울어가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포한 왕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선 대백제전에 맞춰 무령왕의 장례를 유추하고 상상해볼 수 있는 전시 ‘1500년 전, 무령왕의 장례’를 12월 10일까지 연다. 서울 석촌동 고분 등에서 출토된 관련 유물까지 총 126건, 697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무령왕 묘지석과 묘 앞을 지키던 수호신 ‘진묘수’, 매지권, 관 꾸미개 등 국보 11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 널’로 짜인 목관이 눈에 들어온다. 무령왕은 구척장신(九尺長身)으로 불릴 정도로 키가 컸던 만큼 관의 길이도 2m가 훌쩍 넘는다. 영면한 무령왕의 머리와 다리를 지지했던 베개와 발받침, ‘영혼을 위한 백제의 마지막 신발’이라 이름 붙인 ‘금동 신발’도 눈에 띈다. 1500년간 왕릉을 지키던 ‘진묘수’가 노니는 영상 ‘진묘수의 산책’을 지나면 대를 이은 성왕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김미경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간 무령왕이 중심이던 전시와 달리 이번 전시는 무령왕보다는 성왕이 치른 무령왕의 3년상이 핵심”이라며 “아버지 무령왕의 장례를 정성 다해 치르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다지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선 장례를 주관한 성왕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실에서 나와 바로 옆 ‘충청권역수장고’까지 관람하고 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난다.
박물관 마니아이자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을 펴낸 황윤 작가의 ‘백제 시간 여행’ 원픽 여행지는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 그리고 송산리 고분군 전시관(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이라고 했다. 작가의 추천이 아니더라도 백제 시간 여행의 필수 코스인 곳들. 특히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전시관으로 가면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발견 과정에 얽힌 이야기와 발굴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살펴볼 수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부근 전시관은 무령왕릉을 포함해 5·6호분을 실물 크기 모형으로 내부를 둘러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고분 입구가 좁아 허리를 한껏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정교한 아치형 무덤 벽을 장식한 벽돌 문양 하나하나에 백제의 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가 느껴진다. 1971년 배수로 공사 중 극적으로 발견된 무령왕릉 발굴 당시를 재현해 유물이 있던 위치 그대로 놓아둔 전시물과 ‘무령왕의 장례’ 전에서 만났던 실제 유물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다만, 왕릉원 일부는 현재 ‘내·외부 환경 개선 공사’ 중(~12월 30일)이라 전체 관람에 제약이 있다.
◇'사비 백제’의 화려한 부활도
공주와 부여 두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대백제전을 맘껏 즐기려면 하루가 모자라지만, 공주 쪽 행사장인 금강신관공원과 부여 쪽 행사장인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부대 행사가 열리는 신리 백마강 ‘구드래 나루터’가 차로 30~40분 거리에 있어 계획을 잘 짜면 두 도시를 오가며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0월 9일 폐막식은 백제 역사 문화를 재현해놓은 테마파크 백제문화단지에서 열린다. 축제 기간 백제문화단지에선 미디어아트관을 상설 운영하고, ‘백제로의 초대’ 공연을 비롯해 ‘백제 복식 체험’, 백제 무기나 백제 목걸이 만들기 등 사비 백제 체험에 맞춘 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된다.
낮에는 다소 썰렁했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일대는 축제 기간 매일 오후 7시가 되면 ‘백제의 태양’이 다시 떠올라 불을 밝힌다. 미디어아트 전시 ‘소부리의 태양’은 사비로 천도한 백제의 부흥과 문화를 주제로 잡았다.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 역사 속에 존재하던 소부리, 사비 백제의 유적들이 하나둘 불빛이 되어 빛난다. 그중 2코스인 ‘사비의 빛’에선 발굴 30주년을 맞은 금동대향로의 의미를 담고 기념하는 프로젝션 매핑 레이저쇼를 선보인다. 해 질 무렵 관람석에 앉으면 금동대향로 조형물의 조명이 일몰과 어우러져 더 극적인 감동으로 이끈다. 사비 천도, 사비 도성 건립 과정을 미디어 파사드 쇼로 선보이는 ‘부소산문’도 볼만하다. 의지에 따라 차로 부지런히 이동한다면 관북리 유적에서 오후 7시에 시작하는 미디어아트 ‘소부리의 태양’을 관람하고 공주 공산성에서 하는 미디어아트 ‘백제의 夢(몽)’도 이어 달리기 할 수 있다.
◇'대백제전’ 관람 포인트
금강교에서 열리는 미식 행사 ‘백제 정찬’이나 백마강변에서 열리는 ‘캠핑 데이’ 등 사전 신청 프로그램은 모두 예약이 마감됐다. 그래도 아쉬워할 것 없다. 충청남도와 공주시·부여군이 공동 주최하고 백제문화제재단이 주관하는 이 행사에선 무려 60여 가지 프로그램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23일 공주 금강신관공원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내달 9일 부여 백제문화단지에서 하는 폐막식은 ‘필참’이다.
거리마다 ‘전국 노래 자랑’이나 인기 가수 공연 플래카드가 눈에 띄지만, 김성철 대백제전 총감독은 “27~29일과 10월 4~5일 공연하는 창작 뮤지컬 ‘무령대왕’을 비롯해 수상 멀티미디어 쇼, 미디어아트관, 시가지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퍼레이드도 놓치지 말라”고 귀띔했다. 수상 멀티미디어 쇼는 공산성과 사비궁을 모티브로 한 대형 구조물을 금강과 백제문화단지 연못에 띄우고 특수 효과 등을 활용해 무령왕(금강신관공원), 금동대향로와 백제의 마지막 여전사 ‘계산공주’ 이야기(백제문화단지)를 전하는 쇼다. 백제가 남긴 대표 유산을 시작으로 백제의 과거와 미래를 실감형 미디어아트로 만나볼 수 있는 ‘The door: 백제를 만나다’도 기다린다. 축제 기간 미르섬과 금강신관공원 입장료는 ‘한시적’ 무료, 백제문화단지 입장료는 무료다. 각 유적지 관람료는 별도이며 기상 악화 시 축제 프로그램 운영은 일부 변경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