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슬픈 건요, 손바닥 뒤집듯이 구원이 안 돼요. 특별한 해답도 없죠. 그냥 지나가야 하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죠.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게 해주는 말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재작년, 그날도 저는 강연장에 있었어요. 주제가 ‘유쾌한 소통의 법칙’이었습니다. 웃기죠? 여의도에 있는 어느 기업 초청이었는데요, 강연이란 강연은 모조리 취소되던 시기였는데,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힘내고 싶어서 저를 부른 거예요. 힘을 줘야 하는데, 정말 기운이 생기질 않았어요. 그냥 솔직히 이야기했습니다. 오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힘이 안 난다고. 죄송하다고. 제 땅의 지력(地力)도 끝나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쉬지 못했거든요.
청중이 100분 정도 계셨는데요, 동시에 탄식을 터뜨리셨어요. 아…. 이런 울림으로. 저를 위로해주려고요. 저랑 그날 처음 만난 거잖아요. 근데 그 소리가 무슨 큰 종소리처럼 울리더라고요. 그런 소리는 처음이었어요. 처음 만난 사람의 슬픔에 같이 흔들려주는,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소리요. 백 마디 말이 아니라 그 짧은 소리가 사람을 일으키더군요. 갑자기 강연이 너무 잘되는 거예요. 말미에 청중 한 분이 그러시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30분만 더 해달라고. 음, 이래서 머리 검은 것들은 거두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온 거 아닐까요.
소통 강연 시작한 지 20년, 전국 순회 강연만 1만회를 넘겼습니다. 서울대부터 초등학교, 전경련부터 교도소까지 안 가본 데가 없어요. 고검·대검·경찰청·국정원에서도 불러서 다녀왔고요. 거절하면 후환이 있을 것도 같고…. 유튜브 구독자 수도 110만명을 넘겼습니다. 내일부터는 tvN에서 제 이름을 건 소통 강연 방송도 시작해요. 그리고, 올해 제 나이가 오십이 됐어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죠. 이제야 1학년이 됐다는 기분이 들어요.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나이요. 인생을 마스터했다기보다, 제3의 눈으로 나를 직면할 수 있는 나이.
◇모발 이식의 나이, 내가 보인다
제일 달라진 건, 머리카락요. 모발 이식을 총 세 번 받았어요. 결혼은 선택, 모발 이식은 필수입니다. 얼마 전 게임 회사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대표님이 저보다 훨씬 젊더라고요. 예전엔 강연 가면 항상 입구에서 제지당했어요. 무슨 일로 오셨냐고. 늘 눈치가 보였죠. 어쩌다 보니 사람들 앞에 섰지만, 내가 뭘 안다고 떠드나, 너무 자격이 없다…. 그래서 더 미친 듯이 달렸어요. 명절은커녕 주말도 없었어요. 시간당 2만원 소규모 레슨에서 시작해, KBS ‘아침마당’에도 나가고, TV에 나오니 일이 늘었죠. 몸은 계속 빠그라졌어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직접 운전해 전국을 돌며 하루 네 번씩 강연했거든요.
그러다 깜빡 졸았던 거예요. 앞차를 들이받았죠. 안전벨트 안 했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 순간에도 처음 든 생각이 뭔 줄 아세요? 내가 명색이 소통 전문가인데, 이거 해결 잘해야 돼, 정신 똑바로 차려. ‘또라이’처럼요. 이상 징후가 계속 나타났어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할수록 내가 표지판이 돼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방향은 알려주는데, 정작 나는 가만히 멈춰 있는. 행복을 안내하는 건 자신 있어요. 워낙 임상시험도 많이 접해왔고. 그런데 정작 나는 행복하지 않잖아요. 그럼 속이는 거잖아요. 김창옥이 말하는 대로 해라, 그러나 김창옥이 사는 것처럼 살지는 마라. 내 안에서 이 소리가 자꾸 들렸어요.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가 있어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에요. 소통하면 고통이 없고,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온다. 근데 소통이라는 게 타인하고만 하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와도 친해야 해요. 그동안 저를 움직인 건 결핍의 에너지였던 것 같아요. 가난했고, 원치 않게 공고를 갔고, 재수까지 했는데 대입에도 실패했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제대하고 신문 배달로 레슨비 벌어가며 어렵사리 경희대 성악과에 입학했는데, 결국 그 길로 성공하지 못했죠. 내가 성악을 못하니 그 대신에 ‘말’을 하는구나…. 결핍의 에너지는 폭발력은 좋은데, 유해가스가 나오는 것 같아요. 필터에 안 좋은 게 끼고, 결국 막혀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 에너지로만 목적지까지 갈 수는 없어요.
◇결핍의 에너지도 결핍이다
어머니는 무학에 글을 모르세요. 소학교 중퇴하고 노동 일을 하던 아버지는 귀가 들리지 않으셨죠. 그림을 좋아했어요. 화투요. 가산을 사회에 환원하셨고, 어머니와 자주 격투를 벌이셨죠. 도망치고 싶었어요. 화목해질 수는 없는 걸까? 근데요, 사람이 나약해지니까 아버지가 보이더군요. 힘도 있고 뜻대로 잘될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귀가 안 들리는 남자. 부모를 일찍 여읜 장남. 의욕 있고 머리도 좋은데 교육의 기회는 사라지고, 남의집살이하며 동생들 학교에 보내야 했던 남자. 저는 아이가 셋인데, 이 남자는 여섯이었어요. 저는 힘들면 오토바이를 타거나 어디 여행 가서 숨을 데라도 있는데, 제 또래의 그 남자에겐 없었어요.
고향이 제주도예요. 아버지 돌아가신 해에 고향 내려가서 아버지 하시던 일을 한번 체험해봤어요. 현무암을 깨서 돌담 쌓는 일이었죠. 방송국 다큐멘터리 촬영용이었는데요, 땡볕에서 딱 하루 했는데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프더라고요. 고기가 먹고 싶어요. 자연스레 술을 찾게 돼요. 몸이 힘드니까.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잖아요. 그냥 ‘노가다’잖아요. 아, 아버지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겠구나. 용서라기보다는 이해가 됐어요. 왜 저리 사나 싶었는데, 나도 그가 짊어진 짐 중의 하나였겠구나….
제가 해온 강연은 이런 내용이에요. 제가 겪어온, 어찌 보면 너무 뻔한 이야기. 그걸 대중의 언어로 전달할 뿐이죠. 제가 처음 섰던 대규모 강연장이 ‘새마을연수원’이었어요. 2005년 무렵요. 강당에 어르신 500분이 ‘새마을운동’ 조끼를 입고 쫙 앉아계신데, 기존의 ‘빠다’ 바른 목소리로는 도저히 진행이 안 되겠더라고요. 부모님 얘기를 꺼냈습니다. “저희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이 있습니다. ‘화상’이라고. ‘말종’도 많이 쓰고요.” 그제야 웃음이 터지더군요. 말하는 이유는 마음을 얻기 위함이잖아요. “어머님, 그간 힘드셨죠?” 물으면 “네 너무 힘들었어요”라는 대답이 오죠. “그래도 살은 안 빠지셨네요.” 그러면 막 웃으세요.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시선 같아요. 그 시선이 따뜻함을 공유하고 있다면, 말은 잠깐 내려놔도 문제가 안 생기는 것 같아요.
◇덜 익은 말에서 진심의 언어로
컴플레인도 있었어요. 어느 결혼정보 회사 초청 강연이었는데요, 분명히 현장 반응은 좋았는데 강연 끝나고 ‘사과문 써서 보내라’고 항의를 하더라고요. 강연 내용이 다른 곳이랑 겹쳤다고요. 한마디로, 신곡 발표가 아니라는 거였죠. 저는 제 경험을 이야기하니까 레퍼토리가 한정될 수밖에 없어요. 지어낼 수는 없잖아요. 그때 또 느꼈어요. 너무 젊은 나이에 갓 담근 김치를 막 나눠줬구나. 말을 줄이고 숙성시켜야겠다. 말이라는 게 내 주변에 예리한 덫을 쳐놓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거거든요.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리면 안 되니까. 내 말을 완성하는 게 내 삶일 수밖에 없다면, 조금 천천히 해야겠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는 말 있죠. 이 세상에 훌륭한 사람과 안 훌륭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들킨 사람과 안 들킨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실수를 한다면,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그 시간이 충분했다면 용납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누구도 공적인 일에 나서지 못하고 개인으로 살 수밖에는 없을 거예요.
몇 년 전 국회의원 공천을 주겠다고 정당에서 섭외 연락이 왔었어요. 좌·우 양쪽에서요. 거절했어요. 인기만으로, 제가 지닌 말솜씨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걸 아니까요. 소명 의식도 있어야 하고, 포기해야 할 것도 많죠. 어릴 적 꿈이 선교사였는데요, 선교사 되려면 오지(奧地)에서도 잘 견뎌야 하니까 해병대까지 지원해 다녀왔는데요, 어찌 보면 정치인이 성직자보다 힘든 일이잖아요. 말로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양심적으로 말하고 싶어요. 며칠 전에 제주경찰청과 얘기가 됐는데요, 순찰차든 특공대 버스든 그 안에서 경찰 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려고요. 바닷가에서 시체 건지고, 범죄자들 상대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되겠어요.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알아줘야 해요. 영상으로도 만들려고 해요. 감동을 주려면 돈을 안 받아야 하거든요. 공짜 강연을 늘리려고요. 사실 코로나로 타격이 컸어요. 오프라인 강연은 없는데, 유튜브도 해야 하고,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신용보증재단에서 돈도 빌렸거든요. 그럼 다른 걸 팔자. 예를 들면 농산물 같은. 그걸로 돈을 벌어서 진짜 필요한 말만 하자. 그래서 최근에 유기농 식품 회사랑 계약 맺고 계란도 출시했어요. 이름 따서 ‘옥란’이라고. 저는 계란을 더 많이 팔아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청중이 많아요. 울음이 터진 적도 있어요. 천안에 사는 마흔다섯 살 남성 분이 강연장에 앉아계셨는데요, 마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재활중이시래요. 내년부터는 돈을 벌어서 집에 갖다주기로 결심하고, 저 보고 직접 얘기하러 오신 거예요. 강연이 잘 안 되고 힘들더라도, 밤에 새벽에 당신 이야기 듣고 힘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달라고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누구나 힘든데,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람요. 그럴 수 있다면, 그걸로 제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김창옥 강사와 3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를 그의 강연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