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도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기관이 있던 곳이다. 마을 한복판 통제영의 센터 세병관(洗兵館)에 올라서면,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한산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충무공의 담대한 기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이 마을 사람들은, 통영이 조선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이순신은 전쟁이 나면 즉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도록 평상시에도 제조업 장인들을 관리했는데, 이들은 평화로울 때는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전국에 팔았다. 그래서 소설가 박경리는 이순신이 장군이면서 예술가였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통영은 오래전부터 장인(匠人)과 예인(藝人)의 고장이었다. 그런 통영의 기상과 재주를 계승한 예인 중 오늘은 화가 전혁림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화가의 꿈
전혁림은 1915년생이다. 주민등록상 1916년으로 돼 있으나, 실제 생년은 한 해 빠르다. 이중섭이 1916년생이니 그보다 한 살 위다. 통영 무전동에서 태어났는데, 지척에 친구 윤이상과 김춘수의 집이 있었다. 부친은 소지주였고 활을 잘 쏘는 궁사였다고 한다. 모친은 일찍 돌아가셔서 전혁림은 주로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꿈이 남달랐다.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식민 치하 국민이지만 실력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였기에, 전혁림은 처음에는 운동선수가 되려고 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통영보통학교 시절, 장대를 하나 장만해 모래 바닥 위에서 혼자 폴짝폴짝 철봉을 넘으며 연습했다. 그러다 그만 팔이 세 동강 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전혁림은 1년간 치료를 받느라 상급 학교 진학도 늦춰야 했다.
누워서 그는 생각했다. ‘운동선수는 안 되겠으니 문인이 돼 볼까?’ 워낙 문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는 문학 청년이었지만, 언어의 장벽 탓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는 어렵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언어 장벽이 없는 화가가 돼야겠다.’ 그것이 전혁림이 내린 결론이었다. 일제강점기 통영에서 서양미술을 배울 곳은 없었다. 그는 통영의 유일한 전문학교인 통영수산학교에 입학했는데, 수산업을 공부하는 대신 생선을 관찰하고 그렸다. 마침 통영에 있던 일본인 아마추어 화가에게 유화를 접하고, 부산에서 도고 세이지가 운영한 ‘양화 강습회’에 참가해 회화의 기초를 연마한 것이 미술 수업의 거의 전부다. 전혁림은 평생 철저한 독학 화가였다. 그는 말했다. 원래 예술가에겐 스승이 없다고.
◇전업 화가의 유랑 생활
화가 전혁림을 키운 것은 팔할이 ‘통영의 바람’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통영의 문화와 자연 속에서 독학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통영 미륵산 용화사의 화려한 단청에 넋을 잃었고, 색색이 아름다운 자수와 민화의 매력에 빠졌다. 통영 소반, 반닫이, 나무오리 같은 목기의 소박한 미학도 사랑했다. 무엇보다 통영의 푸른 바다! 그 바다는 전혁림에게 세계를 향한 드넓은 비전과 끓어오르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전혁림은 통영 앞바다를 보면서, 이 바닷물은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지중해 혹은 알래스카로부터 밀려온 파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실제로는 아무 뒷받침도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다행히 반 고흐의 동생 테오처럼, 전혁림에게는 형 전혁수가 있어 그를 이해하고 지원해주곤 했다. 형은 전혁림이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일본에서 고급 물감과 화구·화집을 사주었다. 그러나 그 형이 일찍 세상을 뜨고, 전혁림이 늦장가를 들어 처자를 부양하게 되자,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닥쳐왔다. 이 시절 가난하지 않은 화가가 없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전혁림은 단연 1등으로 가난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를 지나면서, 그는 가족을 통영에 남겨 둔 채 혼자 ‘전업 화가’로 마산과 부산을 전전했다. 부산에 있을 때 그는 동광동 삼호여관을 숙소 겸 화실로 삼았다. 시장통의 허름한 3평짜리 방에서, 그는 주로 우동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그림을 그렸다. 2층 여관방에서 끈에 묶은 양푼에 돈을 조금 넣어 아래로 내려보내며 “가래떡 좀 주소” 외치면, 떡이 실려 올라오는 그런 ‘시스템’을 갖춘 방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가끔 깡패들이 들이닥쳐 그림을 빼앗아 갔다. 그나마 그림이 좀 팔리면 전혁림은 같은 여인숙에 묵는 “집창촌도 가고 술집 나가는 언니들”에게 모델료를 주고 누드화를 그렸다. 온갖 민예품이 어지럽게 널린 정물화나 남도의 풍경화를 닥치는 대로 그렸다. 이런 생활을 1977년까지 이어갔다.
◇살아있는 모든 건 슬프고 아름답다
이 시기 전혁림의 작품은 정말 압권이다. 우선 그는 1955년부터 7년간 대한도기 회사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제작한 작업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하다. 전쟁기 많은 화가가 생계를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지만, 전혁림만큼 진지하게 도자기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작가는 없었다. 그의 도자기화는 매우 가느다란 동양 붓을 사용해 날아갈 듯 날렵했다. 빠른 붓질로 단번에 형태를 그려야 하는 도자기화의 특성으로 인해, 전혁림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묘사력을 완숙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도자기화로 연마한 선 처리는 그의 유화에도 적용됐다. 1970년대 그의 작품은 속도감 있는 선이 출렁이는 화면을 연출한다. 선의 굵기를 다양하고 부드럽게 구사할 때는 동양화 붓을 사용하고, 때로 서양화 붓을 섞어 쓰면서 자유자재로 형태를 잡아냈다. 또한 도자기에서 했던 것처럼 유화 물감의 색채 연구도 극단으로 밀고 갔다. 비슷한 색채의 풍부한 변주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화단의 대세는 단색조 회화였으나 그는 말했다. “색채가 없는 세상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결국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모든 살아있음에 대한 확인이다. 그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뒹굴며 스스로의 생명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 날아갈 듯 예리한 선과 다채로운 색채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도구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살아있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은 그의 어지러운 여관방처럼 결코 단정하지 않다. 슬픔과 환희가 뒤범벅돼 있다. 생명은 모든 것의 원천이자 희열에 찬 것이지만, 반면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누드화 속 여인이 지닌 묘한 슬픔의 정체 같은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처절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어떤 소재를 취하든, 그의 작품에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눈부시게 시린 바다색이 공존한다. 퀴퀴한 냄새가 날 것 같은 현실감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현실 너머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섬광의 번뜩임이 존재한다.
◇인생 역전
1979년, 건강이 나빠진 전혁림은 부산 생활을 접고 통영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그해 잡지 계간미술에 실린 ‘과소평가된 작가’ 기사에 전혁림이 이름을 올린다. ‘작가들을 재평가한다’는 제목으로 과대 혹은 과소평가된 작가를 열거한 이 기획은 당시 미술계에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재 기인(奇人) 평론가로 통했던 석도륜은, 과소평가된 작가로 전혁림을 꼽으며 이렇게 썼다. “잊혀져 있어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전혁림. 그야말로 방금 인구(人口)마다에 회자되고 있는, 죽은 그 누구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현존해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서울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전혁림이 아직 살아 있었어? 부산 지역에 나돌던 전혁림 작품이 금세 동이 났다. 영문을 모르던 전혁림에게 서울 예화랑 사장이 통영까지 물어물어 찾아와 거액의 선금을 주며 전시 제안을 했다. 전혁림은 비로소 집에 전화를 처음 놓았다. 리어카를 끌고 이사 다니는 셋방살이도 청산했다. 그 후 전혁림은 예화랑·샘터화랑·호암갤러리·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나중에 전혁림은 인생 역전의 소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민이 나를 이리 살게 해줬어요.”
198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변화된 생활에 맞게 변모했다.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조선 민화와 민예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전통 오방색의 화려한 원색 조각이 사물놀이의 쨍그랑거리는 소리처럼 떠들썩하게 휘날리는 ‘코리아 환타지’ 같은 작품도 남겼다. 옹기토를 이용한 도기 조각도 했고, 각종 목기나 목가구 위에 즉석에서 유화를 그렸으며, 1050개의 목반에 다종다양 문양을 넣어 거대한 만다라를 완성하기도 했다. 7m짜리 벽화 같은 유화 작업에 도전했고, 미국 뉴욕 갤러리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혁림의 ‘통영항’을 청와대 영빈관에 걸면서, 세계의 국가원수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한 때도 있었다. 통영 앞바다에 앉아 세계 최고 작가가 되려 했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
전혁림의 마지막 소원은 “붓을 쥐고 죽는 것”이었다. 2010년 따뜻한 봄날, 여느 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점심을 먹은 후 가벼운 오수를 즐겼다. 그 낮잠에서 전혁림은 깨어나지 못했다. 향년 95세. 그렇게 마지막 소원까지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