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시골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방학마다 가던 충북 음성군 생극의 시골집에서 동생과 나는 산과 들로 뛰어놀 뿐이었다. 하지만 햇빛이 뜨거워지면 지친 강아지처럼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없이 마루에 베개를 깔고 누웠다. 대낮에는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라디오 드라마를 자주 들었다. 어느 날 흘러나온 드라마는 김유정의 ‘동백꽃’이었다. 닭에게 고추장을 먹였다는 대목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낙지를 먹여야지. 고추장을 먹이면 안 되지.” 옆에 있던 할아버지도 거들었다. “고추장 잘못 먹이면 닭이 죽어.” 그 말을 할머니가 이어받았다. “아픈 사람한테 소고기보다 낙지가 더 좋아.” 할머니 말에 갑자기 낙지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충북은 유일하게 바다가 없는 도야”라고 말하며 “낙지는 비싸서 안 된다”고 딱 잘랐다. 나에게는 고추장 먹일 닭도, 낙지도 없었다.

서울 대치동 '보리수'의 육낙무침.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점심이면 만원 안쪽으로 백반을 먹을 수 있기에 사람이 몰리는 집이 삼성동에 있다. 매일 찬이 바뀌는 백반에도 닭볶음탕 같은 것이 올라왔다. 그 집의 이름은 ‘보리수’로 식당치고는 고즈넉한 기분이 들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은 딱 봐도 닮은 얼굴을 한 가족 같았다. 꽤나 운동을 좋아할 것 같은 덩치의 주인장은 매번 주방에 들어가 씩씩하게 요리를 하고 빠르게 찬을 날랐다. 알고보니 이 집은 저녁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여느 백반집과는 달랐다. ‘전라도 광주 당일 도축 직송’이라고 붙은 뭉터기, 즉 갓 잡은 소의 생고기를 팔았고 더불어 낙지 요리가 벽에 붙은 메뉴판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일까? 나는 낙지가 메뉴에 올라오면 꼭 먹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쉽게 사로잡혔다. 더구나 낙지말이, 육낙무침, 낙지초무침 등 낙지로만 가득 채운 메뉴를 보니 저녁 약속을 이 집에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치동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한편에 자리 잡은 이 집 주변은 저녁이 되자 인적이 드물어졌다. 대로변처럼 번화한 동네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세대주택과 사무실들이 레고 블록처럼 이음매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업복합단지에 가까웠다. 마치 공단 가운데 외로이 불이 켜진 구내식당처럼 환하게 문을 연 이 집에 들어섰다. 이미 사람들의 얼굴은 불콰했고 목소리는 드높아 경쾌한 행진곡 같았다. 그 행진곡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낮에 보던 주인장은 여전히 절도 있는 몸놀림으로 좌중을 가로지르며 완급을 조절했다. 주문을 넣으면 음식은 지체하는 기색 없이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던 생고기(뭉터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여 유연하면서도 강한 태극권의 고수와 상대하는 것 같았고,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신선하여 어떤 음식을 먹기보다는 자연 현상을 체험하는 듯했다.

낙지초무침은 낙지를 탱글하게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 양념으로 산뜻하게 무쳤다. 양념이 과하거나 질척이지 않아서 일종의 샐러드 같았다. 낙지말이는 낙지를 쇠고챙이에 말아 직화로 구웠다. 다진 홍고추로 가볍게 양념을 하여 매콤한 맛이 배경처럼 깔렸다. 그을리듯 빠르게 구워낸 솜씨 덕에 낙지는 전혀 질기지 않았고 불을 지른 겨울 논밭처럼 그윽한 향기가 났다. 육낙무침은 육회와 낙지를 무채 위에 같이 올렸다. 주문이 들어가면 바로 낙지를 잡아 도마 위에서 쿵쿵 소리를 내며 자르기 시작했다. 파와 마늘, 참기름 초고추장으로 가볍게 양념한 육회 위에 상앗빛이 나는 낙지가 잘려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급해져 배와 육회, 낙지를 대충 비볐다. 서걱거리는 배의 단맛은 가을 새벽 공기처럼 상쾌했다. 육회와 낙지 역시 갓 딴 과일처럼 오래된 기색이 없었다. 그 세 가지 모두를 함께 섞어 먹으니 바다와 땅, 하늘에서 얻어낸 모든 생생한 감각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매콤하고 달콤한 양념은 주술을 부린 것처럼 그 셋을 하나로 엮어냈다.

본래 가볍고 담백한 양념에 비해 빨갛고 진한 쪽은 서민의 것이라 하여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집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 맛이 더욱 나와 우리를 닮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맛에 홀린 듯 그날 매콤하게 양념하여 자작하게 국물을 남긴 황석어조림과 무지개 빛깔의 홍어 지느러미 부분을 돼지삼겹살 수육과 함께 낸 홍어삼합까지 모두 먹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가게 안은 조용했고 밖으로는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만 들렸다. 끝내 찾아온 완전한 포만감은 오래전 시골집 마룻바닥에 누워 있을 때처럼 평화로웠고 아늑했다.

#보리수: 요일백반 8000원, 낙지초무침 3만5000원, 낙지말이 4만5000원, 육낙무침 4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