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연광철(58)에게 올해는 특별하다. 최고의 무대에서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며 성공한 이 오페라 가수가 한국 가곡을 담은 첫 음반 ‘고향의 봄‘을 내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돌아오는 셈이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김순남 작곡), 김동명 시 ‘내 마음’(김동진 작곡), 한명희 시 ‘비목’(장일남 작곡) 등 18곡을 연광철만의 따스하면서도 웅장한 저음(低音)으로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한, 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가곡에 버금가는 예술가곡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국 가곡을 다시 듣고 다시 불러야 우리도 우리의 시로 된 우리의 노래를 갖는 것입니다.”
연광철의 첫 한국 가곡 음반은 단색화 거장 박서보의 작품을 표지로 후원받는다. 우리 시, 우리 음악, 우리 그림이 함께하는 것이다. 연광철은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공고를 졸업하고도 독학으로 꿈을 이루고 서울대 교수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 해외 매체들은 그에게 ‘살아 있는 최고의 베이스’ ‘세계 최고의 바그너 가수’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한다’는 찬사를 보낸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은 연광철에게 애국가를 맡겼다. “국내에서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편견을, 해외에서는 동양인이라는 편견을 깬 성악가”였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신사동 클래식 전문점 풍월당에서 만난 그는 “외국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늘 한국 노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며 “모국어로 내 음악과 정서를 표현하면서 우리 가곡의 매력을 국내외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동양인 한계 극복한 ‘작은 거인’
‘작은 거인’ 연광철은 예상보다 커 보였다. 키가 얼마인지 묻자 “예전에는 171cm였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줄더라”며 웃었다. “(남성 성악가의 음역 중 가장 낮은) 베이스는 아버지·왕·신·제사장 같은 역할이 많아요. 그런 역을 맡는 서구 성악가들은 보통 금발에 키가 큰 백인이죠. 그들과 비교돼 더 작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신체 조건이 베이스로서 불리한가요.
“오페라 연출가들은 무대에 올렸을 때의 ‘그림’을 함께 봅니다. 아무래도 키가 작으면 쓰기를 망설여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방자보다 작으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데뷔 초기에는 ‘고무 코를 붙이고 무대에 서라’고 지시를 받았다고요?
“시도해 봤는데, 못 하겠더라고요. ‘코만 높인다고 서양인이 되는 게 아니다. 비주얼보다는 캐릭터 해석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어요. 10년 전쯤 ‘돈 조반니’에서는 안나 네트렙코의 아빠 역할을 맡았습니다. 연출가가 ‘이렇게 예쁜 러시아 소프라노가 어떻게 한국인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느냐?’고 못마땅해하더군요. ‘한국 남자가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서 낳을 수도 있지’라며 지휘자가 받아쳐 줬어요(웃음).”
-키 작은 동양 남성이라는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러시아나 동유럽의 베이스는 장신의 거구에서 압도적인 성량이 나오지만 둔탁한 소리를 내뿜는 경우가 많아요. 동양인은 어두운 음색에 밝고 따뜻한 소리를 겸비해 더 인간적인 감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소리와 노래 실력은 기본이에요. 벨칸토 창법을 확실히 체득해야 객석 뒤까지 소리가 깨끗하게 들립니다. 곡과 배역에 대한 저만의 해석을 더하고 이야기가 만들어진 문화적 배경까지 공부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국가·문화권에 따라 아버지가 딸에게 뽀뽀도 다르게 한다고요?
“독일은 성인이 되면 분가합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나 만나 밥 먹는 정도지요. 게르만 민족의 특징일 수도, 루터교(개신교)의 특징일 수도 있어요. 반면 이탈리아, 프랑스 등 라틴계·가톨릭 문화권은 가족끼리 훨씬 살가워요. 부모와 자식이 키스·허그를 더 많이 해요. 그런 차이를 작곡가의 배경이나 어느 나라 공연장이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합니다.”
-음악 교육이 미흡한 상태로 떠난 유학인데 그렇게 빨리 성공한 비결이라면.
“저는 개간되지 않은 자연, 방치된 토양과 같았습니다. 덕분에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 없었고, 선생님들의 지도 아래 좋은 교육을 잘 흡수할 수 있었어요. 시장이나 식당에 가거나 TV를 볼 때 항상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가족과 연인의 행동과 반응을 보고 흡수했다가 무대에서 연기로 보여줬지요.”
연광철은 모차르트와 베르디 등 다양한 작품을 섭렵했는데 바그너 전문 가수로 특히 유명하다. 1996년부터 바그너 음악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탄호이저’ ‘발퀴레’ ‘파르지팔’ 등을 100여 회 공연했다. 그는 “무대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단역부터 한 걸음씩 올라갔다”며 “오페라 가수들에게 바이로이트는 기회의 땅이자 무덤”이라고 했다.
-독일어 뉘앙스를 독일 사람보다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는데.
“한국도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고개 하나 넘으면 말이 다르잖아요. 독일어도 지역색이 강해요. 무대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바그너는 작센 사람이라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로 가사를 써놨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주려면 소리보다 가사가 더 중요합니까.
“화성이나 선율로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야기를 파악하면 공감이 훨씬 커져요. 이번 한국 가곡도 그렇지만 노래할 땐 가사를 더 명확하게, 톤을 실어서 발음합니다.”
-일상의 독일어도 잘하나요.
“발음이 좋다고들 합니다. 베를린에 오래 살아서인지, 다른 지역에 가면 ‘베를린 사투리 쓴다’는 소리를 들어요. 뉴욕에서 영어로 말하면 ‘독일 악센트가 많이 들린다’며 신기해하고요(웃음).
◇산 넘어 통학하며 목청을 틔웠다
연광철은 충북 충주 산골에서 태어났다. 비포장도로로 세상과 겨우 이어진 오지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때 외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조국찬가’ ‘새마을노래’ 단 두 곡이었다면서요.
“학교에서 건전가요만 가르쳤으니까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려면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했는데, 저녁에 캄캄해지면 무서워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깨달았지요. 나한테 흥이 있구나. 남들과 다른 목청을 가졌구나….”
-아버지와 형제도 목소리가 낮고 굵은가요.
“그렇죠. 집안 분위기가 많이 다운(down)돼 있어요, 하하. 주먹만 한 밧데리(건전지)를 붙들어 맨 라디오 혹시 아세요? 아버지와 산에 나무하러 가면 그 라디오로 유행가를 들었어요. 어쩌다 클래식 주파수가 잡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브람스의 ‘대학 축전 서곡’을 들은 기억도 납니다.”
-중학교 때 독일 가곡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듣고 LP판을 샀다면서요.
“슈베르트 가곡 ‘마왕’이 유명하다길래 들어보고 싶었어요. LP판을 샀지만 집에 전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음반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파는 가게가 있었지요. 그렇게 옮겨 들었는데 굉장히 드라마틱했습니다. ‘나도 부를 수 있겠다’ 싶었고요.”
-하지만 공고로 진학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빨리 취업해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내 음악 대회에서 ‘선구자’를 불러 1등을 한 거예요. 공고는 졸업 전 취업 관련 자격증을 따요. 그런데 저는 목표했던 건축설계기능사 자격증 시험에는 탈락했고. 노래가 좋으니 음악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충주에서 가깝고 교사 자격증도 받을 수 있는 청주대 음악교육과를 선택했습니다.”
-그 과정은 드라마틱하네요.
“고3 때 9월부터 넉 달 동안 급하게 입시 준비를 했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도와주셨습니다. 합격하자 아버지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셨지요.”
대학에 진학한 연광철은 여러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때까지는 세컨드(2등) 인생”이었다. “1987년 서울에서 열린 콩쿠르에 세 번 나갔는데 죄다 2등만 했어요. 지방대라서, 비주류라서. 오기가 생겼습니다.”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도
어쩌면 그것이 연광철의 오늘을 만들었다. 그는 1990년 단돈 700달러를 쥐고 불가리아 소피아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1992년엔 독일 베를린국립음대로 옮겼다.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1994년부터 10년간 베를린 국립오페라 전속 솔로이스트로 활동했다.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러브콜이 쏟아져 들어왔다. 2018년에는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유럽이 궁금했어요. 슈만의 연가곡 ‘디히터리베’의 제1곡이 ‘아름다운 5월에’입니다. 한국은 3월에 이미 개나리·진달래 등 꽃들이 다 피잖아요. ‘왜 5월이 아름답다는 건가’ 싶었어요. 독일 가서 알았죠.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서 5월이나 돼야 개화하더라고요.”
-도밍고 콩쿠르 우승으로 ‘차세대 가장 주목해야 할 베이스’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사실 독일 지역예선에서 떨어졌는데, 스웨덴에서 한 명이 출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제가 나가게 됐어요. (독일 지역예선에서 왜 떨어졌는지 묻자) 텃세죠. 독일은 독일 사람을 내보내는 게 정상이잖아요. 심사위원들도 후배나 제자가 콩쿠르에서 입상하길 바라니까요.”
-도밍고가 1995년 내한 공연을 할 때 함께 무대에 섰는데.
“국내 주관사는 ‘연광철 대신 한국에서 유명한 바리톤을 쓰자’고 했지만, 도밍고가 ‘얘가 내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인이다. 내가 데려오겠다는데 무슨 소리냐’며 밀어붙였어요. 그 후로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한국에서 제 노래를 듣고 싶어 하고, 극장이나 오페라단에서 저를 픽업했다면 올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러질 않았어요. ‘연광철은 유럽과 미국 무대에서는 잘 팔리지만 한국에는 덜 알려진 성악가’라는 말도 한때 들었지요.”
-공고에 지방대 출신으로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됐는데 7년 만에 사임했습니다.
“내 업은 노래인데 대학에서 가르치느라 업을 소홀히 할 순 없다는 마음이 컸어요. 교수는 성악가로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모님은 서운해하셨지만.”
-무례한 질문이지만, 베이스는 인기 없는 음역 아닌가요?
“스타가 별로 없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화려하게 피었다가 일찍 지는 테너, 바리톤과 달리 베이스는 ‘가늘고 길게’ 장수할 수 있는 음역이에요(웃음). 목 관리를 잘하고 체력이 받쳐주면 70대 후반까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한국 가곡 부를 땐 나 자신”
연광철은 지난여름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한국 가곡 18곡을 녹음했다. 이달 말 발매되는 첫 한국 가곡 음반에는 윤이상 ‘달무리’(박목월 시), 김순애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 홍난파 ‘사랑’(이은상 시) 등 1930~1970년대 가곡이 3국어로 번역된 가사와 함께 수록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곡가 김택수(43)에게 부탁해 만든 ‘산 속에서’(나희덕 시) 같은 신곡도 있다. 그는 “성악가가 소리 자랑을 위해 불러서는 안 된다. 노래 자체가 시에서 시작해야 하고 시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음악부터 만들고 시를 붙이는 작업 방식이 한국 가곡의 문제인가요.
“좋은 소리보다는 메시지가 더 중요해요. 작곡자가 음성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선율부터 만들면 아무 의미 없는 음절을 강조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조사를 강조하거나, 이야기를 무시하는 곡들도 있어요. 진짜 감동은 시에서 오는 겁니다.”
-애국가는 어떻습니까.
“애국가는 ‘동해 물과’로 시작하는데 ‘동’이 ‘해’보다 음정이 낮으니 ‘동해 물과’가 아니라 ‘해물과’로 들리기 십상이죠. 보완하려면 가수가 잘해야 해요. ‘동’을 ‘해’보다 훨씬 묵직하게 불러야 ‘동해 물과’로 들립니다. 안익태 선생님이 ‘동’을 예비박처럼 작곡했어요. 선율부터 잡아놓고 말을 붙였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겁니다.”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가는 어떻게 부르게 됐나요.
“파리 오페라극장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급하게 요청이 왔어요. 이틀 휴가를 받아 비행기 타고 들어와서 그날 저녁 녹음했고, 이튿날 오전 10시 취임식에서 애국가 부르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갔어요. 애국가에 저만의 해석을 더하지는 않았고 나라가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음악과 가사가 훌륭하게 붙은 모범 사례라면.
“대중가요 중에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있습니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처럼 강조할 음절에 악센트를 찍으니 딱딱 맞아떨어지잖아요. 히트한 이유가 있어요.”
-이번에 음반을 내면서 한국 가곡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데.
“한국어는 유럽 라틴어 계통과 유사점이 많아요. 예술가곡이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또 한글 모음은 어느 나라 말도 표현할 수 있어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성악가로서 개인의 추억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어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한국 가곡 100년사를 아우르면서 흐름을 볼 수 있는 곡들을 추렸어요.”
-외국 가곡을 부를 때는 문화·역사·정서를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는데.
“독일어 노래를 부를 땐 베토벤이 다녔다는 술집, 슈베르트가 살았다는 동네를 연상해야 합니다. 의지할 게 필요해 일부러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한국 가곡을 부를 땐 그냥 저 자신이면 됩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김소월 시 ‘산유화’)라고 노래하면 제가 어려서 등·하교하며 넘던 산길, 이슬 때문에 신발이 젖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구체적인 그림과 정서를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그는 앞으로 한국 가곡을 100곡까지 불러보고 싶다고 했다. 오는 12월 3일엔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가곡 독창회를 연다. 연광철이 부른 ‘내 마음’을 재생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귀를 가득 채우는 풍성하고 부드러운 음성. 그 파도에 실려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가곡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