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 위 고기에 육즙이 한두 방울 맺히기 시작할 때, 여행 계획표를 만들 때, 두근거린다. 기자는 휴가 갈 때 보고서 같은 일정표를 만든다. 지난 7월부터 쓴 계획서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놨다. ‘야채가 좋은 홋카이도의 가을을 즐기고 농장, 목장 방문. 코로나 이후 오픈한 숙소에 주로 묵으며 일본 접객업 변화를 알아본다’.
한국 면적의 80%이면서 인구는 10분의 1(538만명)에 불과한 홋카이도는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중 인구밀도(1㎢ 당 68.6명, 도쿄도는 6818명)도, 소득도 낮다. 과거 여행객이 ‘설국 홋카이도’를 사랑했다면, 요즘은 ‘여름 홋카이도’ ‘단풍철 홋카이도’도 사랑받는다. 코로나가 가져온 감성이다.
미식가들도 ‘홋카이도 야채’를 말한다. 토착 야채 40종을 섬세하게 요리하는 ‘교야사이(京野菜·교토 야채)’는 고급스러운 장르 요리다. 반면 홋카이도 채소는 찌거나 볶아 만만하게 먹어 식재료로서 인기 있다. 기자는 명백한 ‘육식인’이지만, 홋카이도 옥수수, 호박, 심지어 당근까지 좋아한다. 더 단단하고, 더 달다. 낙농의 지방, 홋카이도에는 우유와 치즈를 생산하며 카페를 운영하는 목장도 지천이다. 여행지는 그렇게 결정됐다.
“티끌 하나 없던 일본 료칸에 머리카락이 보이고, 호텔 직원도 훈련이 부족하다.” 일본 여행객의 불평이 많아졌다. 코로나가 만든 ‘대(大)퇴사 시대’는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언론은 “툭하면 잘리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남 시중 들며 살지 않겠다”는 이직자들의 말을 전한다. 세계 제1의 세심한 서비스, 이른바 ‘오모테나시(환대)’로 유명한 일본 숙박 업계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고 있을까. 요즘 한국 2030이 많이 찾는 비에이, 후라노 등 동부는 다녀온 터, 이번에는 삿포로~하코다테 라인, 효도 관광 라인으로 동선을 짰다.
호시노 신상: 저가 호텔 vs 현대식 료칸
1914년 가루이자와 료칸에서 출발한 호시노그룹은 일본 전역에서 고급 호텔과 료칸을 운영 중이다. 도쿄 도심에서 최고급 료칸을 재현한 ‘도쿄 호시노야’는 단연 최상위권 호텔이다. 몇 해 전 묵었던 ‘토마무 리조트’에서 매우 만족한 기억이 있다. 안도 다다오 ‘물의 교회’와 워터파크 ‘미나미나 비치’의 그 아름다움. 삿포로 도착 날, 리조트 전문 기업이 삿포로에 세운 저가 숙소 ‘OMO3 스스키노’로 향했다.
스스키노는 삿포로 명물 ‘진기스칸’ 식당들, 새벽까지 문 여는 라면집이 많은 유흥가다. 2022년 오픈한 이 호텔은 식당 대신 편의점형 카페를 뒀다. 인근 맛집에서 사온 주먹밥(오니기리), 빵, 샐러드 등 간단한 먹거리와 음료를 갖췄다. 편의점보다는 퀄리티도, 가격도 높다. 체크인·아웃, 음식 계산 모두 ‘무인 키오스크’로 처리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2인, 2박을 30만원에 예약했더니 2000엔짜리 쿠폰 2장을 줬다. 식당·프런트 직원을 줄이고 대신 호텔 스태프가 ‘라면집 순례’ 등 다양한 체험을 안내한다. 밤 9시 ‘술집 순례’를 따라나섰다. 식당, 술집이 3500개가 넘는다는 스스키노에서 ‘현지인 맛집’을 예습하기 좋은 프로그램이다. 최고의 진기스칸 식당 ‘다루마’, 새벽에도 줄 서는 라면집, 오후 5시~새벽 4시 문 여는 나이트 베이커리 등 20곳을 함께 순례한다. 스태프는 능숙지 않은 영어로 성실히 답을 해줬다. 일본어를 알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욕실은 일본답게 작지만, 릭실(Lixil)의 마사지형 샤워패널 때문에 목욕을 하루에 세 번 했다. 10여 개 노즐이 목,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시원하게 마사지해준다. 요즘 일본 TV에서는 몸을 담그면 저절로 때를 벗겨주는 릭실의 욕조 광고가 자주 나온다. 하루 이틀 묵기에 부족함이 없는 호텔이다.
삿포로에서 서쪽으로 1시간,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시라오이(白老)에 호시노그룹이 2022년 오픈한 현대식 료칸 ‘가이(界)포로토로 이동했다. 이 도시의 볼거리는 아이누족 박물관과 포로토 호수가 거의 전부다. 기자는 대도시에서는 저가, 소도시에서는 고가 호텔을 예약하는 편이다.
돈값 하는 숙소다. 객실 30개로 아이누 주거지를 본뜬 야외 온천탕 건축이 특히 압도적이다. 가이 포로토의 ‘경험 서비스’는 아이누 전통 부적 만들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료칸답게 석식 가이세키는 칠품 전채와 탕, 구이, 조림, 튀김 등 순서대로 나오는 모든 것이 ‘눈으로 먼저 먹는 일본 요리’ 그대로였다. 좋은 음식, 수질 좋은 노천탕에 비해 젊은 직원들의 서비스는 매뉴얼을 그대로 답습한 정도였다. 전통 료칸의 지극정성 서비스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2% 부족한, 그런 것이 부담스러운 젊은 세대에게는 딱 좋게 느껴질 료칸이다.
스키 도시 ‘니세코’에서 만난 복층 빌라
홋카이도는 대만인, 한국인이 외국인 관광객 1, 2위를 다툰다. 니세코는 홍콩, 호주, 유럽, 미국 등 다국적 스키어들이 ‘파우더 스노’를 찾아온다. 니세코에 부쩍 화려한 호텔이 늘어나고, 대도시 셰프들이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있다. 일본 리조트 그룹 쓰루가가 2020년 오픈한 ‘니세코 곤부온센 쓰루가 벳소 모쿠노쇼(ニセコ昆布溫泉 鶴雅別莊 杢の抄)’를 필두로 산스이 니세코(山翠ニセコ), 세쓰 니세코(雪ニセコ), 라쿠스이산(楽水山), 히가시야마(東山) 니세코 빌리지 등이 평가가 좋은 곳. 기자는 2020년 오픈한 ‘안다루(Andaru) 컬렉션 니세코’를 골랐다. 일본 사이트에서 평점이 4점 이상인 데다 넓은 대지에 6채밖에 없는 독채 빌라가 궁금했다. 체크인 후 빌라로 들어서자 탄성이 나왔다. 높은 다락형 층고,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복층 구조, 발뮤다로 채운 주방까지, 4인 가족이 와도 여유롭겠다. 후지산을 닮은 요테이산을 보며 야외 욕조를 즐기는 기쁨은 누리지 못했다. 예약이 필수, 오후 5시 이미 젊은 커플이 노천욕을 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저녁 식사로 보상받았다. 홋카이도 감자와 옥수수를 사용한 냉수프, 훈제향을 가미한 수제 버터와 직접 구운 사워도우까지 ‘일본식 프렌치’의 정석을 보여줬다. 뭐든 도와주려는 직원 서비스도 감동적이다. 고가의 숙소지만 비수기에는 대폭세일한다. 저녁 코스 요리는 1인 1만2000엔. 다시 가서 노천욕을 하고 싶은 숙소다.
별이 다섯개 뷔페 vs ‘막 퍼줘’ 호텔
오픈 4년 째인 ‘하코다테 센추리 마리나 호텔’을 예약한 후 계획표에 이렇게 적었다. ‘호텔 뷔페에서는 커피와 요구르트만 먹고, 코앞 아침 시장으로 가서 우니돈을 먹는다. 1일 2회 조식’. 그러지 못했다. 조식 뷔페는 좀 과장하면 서울의 고급 호텔 뷔페보다 나았다. 하코다테, 노보리베쓰 같은 온천 도시가 물은 물론 밥(뷔페)도 좋다는 건 들었지만, 이 정도 인심일 줄은 몰랐다. 1박에 20만원이 안 되는데, 괜찮은 트윈 베드룸, 신선한 채소와 해물로 그득한 뷔페, 인상적 스카이 노천탕, 베개 교체와 아로마 디퓨저 서비스 등 ‘사장님이 미쳤어요’ 수준의 서비스가 이어졌다. 지인에게 무조건 추천할 작정이다.
오타루가 반짝이는 연인의 눈빛을 닮았다면, 하코다테는 오래 산 노부부의 눈빛 같은 도시다. 느긋하게 다니면 된다. 1913년 개설된 노면전차를 타면 좋다. 하코다테 언덕에 자리 잡은 러시아 하리스토스 정교회, 영국 성요한교회(성공회) 등 근대 건축물을 보거나 케이블카를 타고 하코다테 산 정상에 올라 불 켜지는 하코다테를 감상(하려면 최소 2시간 전에 올라가 전망대 자리를 잡아야 한다)하면 된다.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 가사의 모티프가 됐다는 ‘오누마 국정공원’의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베르주’ 스타일 호텔에서 프렌치 요리를 먹는 게 마지막 날 목표였다. ‘오베르주’는 프랑스어로 숙박이 가능한 레스토랑을 말한다. ‘하코다테 오누마 쓰루가 리조트 에푸이(函館大沼 鶴雅リゾート エプイ)에 체크인 후 자전거를 빌려 하코다테 최고라는 ‘야마카와 목장(山川牧場)’에서 농후한 우유와 천국 같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맛봤다. 세 개씩 먹지 않은 게 후회된다. “프렌치 풀코스 디너를 먹기 위해 에푸이에 투숙한다”는 소문이 맞았다. 조식은 양식을 일본식 쟁반에 내주는데, 역시나 싹싹 긁어먹었다. 미식 경험과 호텔에서의 화려한 하루를 상상한다면, 이 리조트가 떠오를 것 같다. 2016년 오픈했는데 위치와 정원 인테리어가 훌륭한 반면, 룸 인테리어는 상당히 진부하다. 조·석식 포함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밥을 먹지 않는다면 굳이 이 호텔을 찾을 필요는 없다.
일본 갈 땐 실내복, 화장품 많이 챙기지 마세요
료칸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실내복’을 주는 곳이 여전히 많다. 삿포로 OMO3 스스키노부터 모든 숙소에 실내복이 1~3개씩 준비돼 있었다. 에푸이 리조트의 경우 서랍장에 잠옷, 실내복, 실외복 3종류, 옷장에 외출용 가운, 욕실 가운 등을 준비해놨다. 욕실에도 페이스 미스트부터 올인원 젤까지 화장품이 7종류나 있었다.
좋은 호텔일수록 손님 고민을 잘 해결해준다. 오지에서 렌터카 사고가 나서 차를 반납했다. 니세코에서 움직이려고 보니, 완행 기차로는 4시간 30분, 택시로는 1시간20분이 걸렸다. 사정이 있어 택시비를 탈 수 밖에 없었는데 비용이 4만~4만5000엔(구글 검색). 이런 금액은 처음 봤다. 니세코 호텔의 직원에게 애절하게 부탁했다. “4만엔은 너무 비싸요. 혹시 저렴한 게 없을까요?” 택시회사 두 곳과 통화 후 그가 말했다. “싼 건 다 예약됐고, 고급 택시만 남았는데 일반 택시 요금으로 가준단다.” 택시가 출발할 때, 기자는 또 직원에게 부탁했다. “꼭 지름길로 가 달라고 기사에게 말해 주세요.” 산고개를 넘어 목적지에 당도했다. 2만5000엔이 나왔다. 돌아와서 이메일로 감사인사를 보냈다. “너무 비싸요”라는 말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일본 숙소는 호텔 홈페이지나 이큐(ikyu.com), 구타비(gutabi.jp) 등 일본 사이트에서 예약하는 게 좋다. ‘80일(60일)전 예약 특전’으로 20~40%, ‘사전 포인트’ 제도로 5% 추가 할인 등 혜액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