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까지만 해도 지겨운 여름 언제 가나 했는데, 비가 몇 번 오더니 날이 금방 쌀쌀해졌다. 여름이란 계절은 참 이상해서 함께 있을 땐 지겹고 곁에 없을 땐 그립다. 분명 걸음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다녔을 텐데, 뜨거운 볕 아래 빨갛게 까맣게 탄 팔을 보면서 분개했을 텐데, 벌써 아름답게 미화돼서 그저 뜨겁고 청량한 시간이었던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여름이 오면 또 깨닫게 될 거다. 여름이 얼마나 지독하게 덥고 찐득하고 지치는 계절인지. 하지만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내내 지난여름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렇게 곱씹을 기억 중 하나는 7월의 여름날 아침, 극장을 찾은 일이다. 그즈음의 나는 빠듯한 시간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영상 편집 일 때문에 매일같이 밤을 새웠다. 작업실 소파에 웅크려서 쪽잠을 자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뻑뻑한 눈을 비비며 편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잘 가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따뜻한 물에 개운하게 샤워를 하거나 침대에 등을 붙이고 자는, 아주 당연한 일상도 꿈꾸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도 밤을 꼬박 새워서 작업을 마쳤는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카페인과 비타민을 내리 쏟아부은 탓에 각성 상태에 이른 것일까. 집에 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누굴 만나긴 너무 이른 시간. 문득, 여름의 기운이 가득한 영화를 한 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종로구 경희궁 옆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에무'. /오세연 영화감독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와중에,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목적지는 광화문역 근처, 경희궁 뒤쪽에 위치한 에무시네마.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기 위해 또는 독립영화와 관련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그곳을 자주 찾았다. 조조 영화를 보기 위해 방문한 건 처음인지라 어쩐지 그 익숙한 공간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만큼, 에무 1층은 책이 가득 꽂혀 있는 북카페다. 읽고 싶었던 신간과 각종 영화 서적, 그림책까지. 테라스 바깥으로 보이는 작은 숲이 카페의 분위기를 더욱 싱그럽게 만들어 줬다. 언젠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 많은 책을 펼쳐 보고 싶다. 매표소 직원이 출근하기도 전에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10초에 한 번씩 시계를 보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책은 한 권도 만져보지 못했지만.

예매한 티켓을 들고 상영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극장에 혼자 앉아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러 들어왔다. 기다림 끝에 보게 된 영화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해변의 폴린느’(1983). 부끄럽지만, 로메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적 허영심이 많을 것 같다는 오래된 편견이 있었다. 언제부터 또는 어디서부터 그런 편견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보게 된 ‘해변의 폴린느’의 스틸컷이 그야말로 여름 그 자체라서, 여름이 지나기 전에 꼭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튼 그렇게 처음 본 로메르 영화는 솔직하고 쾌활하고 웃겼다. 늦여름, 이혼한 사촌 언니 마리옹과 해변이 있는 작은 마을로 휴가를 떠난 폴린느. 말도 많고 사랑도 많은 어른들을 다소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 같았다. 그러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또래 남자 실방에게 사랑을 느낀 폴린느는 감정이라는 파도 위에서 서핑하게 된다. 사랑은 유치하고 지겹고 우스운 것이라고,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말하다가도 사랑이 만드는 모든 감정과 행동들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였다.

밤을 꼬박 새웠으니 영화를 보다 졸게 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청나게 많은 대사들을 마구 쫓아가다 보니 나도 그들과 함께 사랑을 찾아 프랑스 해변가를 산책하고 나온 것만 같았다. 로메르와 로메르의 팬들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늦은 만큼 열심히 좋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계절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는, 영화 속 장면들마저 내가 보낸 계절의 기억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다.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마주한 축축한 여름비 냄새와 에무의 뒤뜰에서 푸른빛을 뿜고 있는 나무들까지 왠지 낭만적이었다. 계절의 모습을 창문으로, 스크린으로 한데 담아내는 에무에서 가을과 겨울에 만나게 될 풍경은 어떤 것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