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평생 세 번 죽을 수 있을까. 안과 의사 공병우(1906~1995) 박사는 그런 경험을 했다. 20세기를 살면서 21세기를 내다본 발명가로도 기억된다. 대한제국 때 태어난 공병우는 열세 살 때까지 머리를 치렁치렁 땋고 서당에 다녔다. 스무 살에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했다. 우리나라 안과 1호는 그가 1938년 서울에 연 공안과다.
1939년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공병우는 불효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향에 ‘공병우 사망’ 전보를 띄웠다. 일본식 이름으로 된 호적에서 자기 이름을 합법적으로 빼내기 위해서였다. 공병우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개업 직후 어떤 점잖은 환자의 눈병을 치료했더니 이렇게 한탄하더란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한글이 탄압받고 있어요. 조선 사람들마저 제 나라 글에 관심이 없고 무시합니다.” 이극로 선생이었다. 공병우는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내가 정작 한글에 대해 ‘눈뜬장님’이었다”고 고백했다.
정신적 개안(開眼)과 같았다. 최초의 한글 시력검사표를 만든 그는 한글 타자기 발명에 몰두했다. 신체 해부하듯 영문 타자기를 뜯어놓고 구조를 익혔다. 가로쓰기를 하면서 받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였다. 병원 일은 뒷전이라 ‘공 박사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9년 마침내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구성 원리에 맞게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했다.
공병우는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두 번째로 죽을 뻔했다. 조선공산당원들이 위조지폐를 찍어낸 ‘정판사(精版社) 사건’ 연루자 중 한 명이 ‘경찰에 고문당해 눈이 멀었다’고 주장했는데, 공병우가 당뇨로 인한 실명이라고 진단한 일을 트집 잡았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을 기다리는데 ‘인민공화국에 타자기 설계도를 바치라’며 회유했다. 한글 타자기가 공병우를 살린 셈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납북되다 도망쳐 나왔다.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다. 정전협정에서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할 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 가면 전시 중인 공병우 타자기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1995년에 사망했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사후에 기증한 눈이 환자에게 이식됐기 때문이다. 세 번 죽었지만 공병우의 눈은 아직 살아 있다.
※ QR코드에 휴대폰을 갖다 대거나, 인터넷 주소창에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5743을 넣으면 구독 창이 열립니다. ‘이메일 주소’와 ‘존함’을 적고 ‘구독하기’를 누르면 이메일로 뉴스레터가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