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 A(70)씨는 지난달 서울 합정동 대형 카페에 들렀다가 뭔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진동벨’이 없어진 것이다. 대신 종업원은 “키오스크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라”고 설명했다. 음료가 준비되면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전송된다는 것. 이 과정이 번거로웠던 A씨가 재차 진동벨을 요구하자 종업원은 그러면 주문대 옆에서 기다렸다가 가져가라는 식으로 응답했고, 분개한 A씨는 이 경험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다소 격정적인 해당 게시글에는 세대 논쟁을 방불케 하는 댓글이 1000개 가까이 달렸다. “불친절한 게 맞는다”는 의견부터 “손님이 시대 흐름에 뒤처진 것”이라는 목소리까지.
◇드르륵… 진동벨은 어디로
명실상부 카페의 나라 대한민국, 20년간 이곳을 지배한 물건이 바로 진동벨(buzzer)이었다. 2004년 한 삐삐 제조 회사가 국내에 도입했고, 인건비 절감과 편의성 덕에 카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점차 양상이 바뀌고 있다. 진동벨 철수에 나서는 매장이 속속 늘고 있는 것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할리스 관계자는 “훼손 및 분실 등 유지·보수의 비효율적인 측면을 고려해 사용 매장을 점차 축소하고 모니터로 주문 번호를 안내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저가형 커피 매장 1위 메가커피 관계자 역시 “필요에 따라 진동벨을 비치한 일부 가맹점도 있겠으나 현재 전 매장은 모니터 호출 방식으로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6월 15일 오전 11시 30분쯤 카페 방문하신 고객님, 저희 진동벨 좀 돌려주세요. 연락 부탁드려요.” 일리(illy) 카페 점주가 지역 친목 카페에 글을 남겼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고객이 집에 가져가는 분실 사례, 떨어뜨려 고장 나는 사례 등이 적지 않다”고 했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진동벨 가격은 보통 개당 5만원이 넘는다. 카페 사장님들이 고민에 빠진 이유다. 본사가 가맹점에 진동벨을 시중보다 비싼 값에 사실상 강매하고 있다는 폭로도 최근 나왔다. 이 내용은 이달 국정감사에서도 다뤄질 예정이다.
◇목욕탕 팔찌, 밀대, 전등 드려요
카페는 감성의 동의어. 이른바 ‘핫플레이스’에서는 더 빠른 속도로 진동벨이 사라지고 있다. 분위기의 차별화를 위해서다. 지난달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 ‘투아투아’는 진동벨 대신 번호가 새겨진 제빵용 밀대를 준다. 대전 관저동 레트로 카페 ‘초롱다방’은 옛날 목욕탕 사물함 팔찌를 나눠준다. 카페의 특성을 확실히 각인하는 도구다. 서울 문래동 ‘폰트’는 작은 전등을, 경기도 파주 ‘하우스 오브 컨티뉴’는 진동벨 기능이 있는 커다란 자동차 핸들을 준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곳”이라는 평가.
로봇의 시대도 개막했다. 이디야커피 군산 지곡점에서는 서빙 로봇이 음료를 배달한다. 할리스 역시 최근 공덕점에서 3D 카메라가 탑재된 서빙 로봇 운영을 시작했다. 태블릿 PC로 주문하면 로봇이 픽업대에서 메뉴를 싣고 해당 테이블로 이동한다. 할리스 관계자는 “충격 흡수 장치가 적용돼 흔들림에 취약한 음료도 안전하게 전달한다”며 “최신 기술로 편의와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고자 서비스 및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고객이 원하는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카페 스타벅스는 ‘진동벨 제로’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스타벅스 창업자의 경영 철학이 ‘고객과의 스킨십’이기 때문이다. 직원이 고객의 닉네임을 목청껏 호명하는 ‘콜 마이 네임’ 서비스는 이곳의 트레이드 마크. 직장인 박모(37)씨는 “진동벨이 편리하긴 하지만 기계식 소통이 삭막하다고 느껴진 적도 많다”며 “누군가 내 별명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유쾌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끄러운 매장에서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불편이 발생해 스타벅스는 모바일 앱 주문·수령 알림 서비스 ‘사이렌 오더’를 2014년 도입했다. 한국에서 개발돼 전 세계로 수출된 기능이다.
“송혜교님, 음료 세 잔 나왔습니다.” 제주도 전역으로 확장한 프랜차이즈 리치망고는 고객에게 연예인 이름이 적힌 푯말을 고르도록 한 뒤 해당 이름으로 호명한다. 재미를 위해서. 서울 행당동 ‘봉순이네다락방’ 카운터에도 연예인 이름이 적힌 나무 명패 10여 개가 놓여 있다. 결제를 마친 뒤 명패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으면 이윽고 방송이 나온다. “한소희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다만 이때 다른 손님의 표정을 살피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