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님, 일어나세요. 그렇게 누워만 계시면 엉치에 욕창 생깁니다. 대표님께서 맞고 계신 수액이면 아무것도 안 먹어도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단식 중이던 지난달 23일 오전. 한 내과 전문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사진 속 이 대표가 맞는 하얀색 수액에 대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전해질, 심지어 비타민까지 다 들어 있는 TPN(혈관 뷔페)”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급속히 퍼지자 머쓱했던 것일까. 이 대표는 이날 오후 단식을 중단했다.
진실을 폭로한 내과 전문의는 지난 8월까지 본지에서 ‘호남 통신’을 연재한 박은식(39)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젊은 호남 보수 우파’를 자칭하는 그가 호남의 정치 정서, 한국 근현대사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거침없이 쓴 ‘호남 통신’은 매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중에도 그는 굵직한 정치 현안에 앞장서 목소리를 낸다. 지난 대선 때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어떻게 조국 전 장관을 광주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느냐”며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로 화제가 됐다. 요즘에는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 공원 사업에 대해 반대 시위와 연설을 하느라 바쁘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박 대표는 “정율성의 실체를 알게 된 광주 시민들도 기념 공원 반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호남 예외론’에서 이제 벗어나야
달라진 분위기를 의식한 것일까. 2014년부터 ‘정율성 동요제’를 주관한 광주 MBC는 지난달 26일 동요제를 취소한다고 공지했다. 박 대표는 “반대 운동이 거둔 소소한 성과”라며 “정율성 공원이 무산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정율성 기념 공원 반대 운동의 상황은 어떤가.
“광주에서 정파를 초월해 5·18 공법 단체, 4·19 단체, 전국학생수호연합 등이 모였다. 번화가에서 행진을 하다 감격하게 된다. 정율성 거리와 동상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기념 공원이 만들어지는 줄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광주 시민도 대부분도 그랬던 거다. 저희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니 시민들이 휴대폰을 꺼내 ‘정율성이 누구야’며 찾아보더니 ‘왜 우리 세금을 들여 이런 사람을 기념하느냐’고 동조해 주시더라. 이제 호남도 반대 여론이 더 높다.”
-강기정 광주시장이 정율성에 대해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자’고 했다.
“정율성의 공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문재인 정권에서 정율성을 띄우려고 수훈을 추진했는데, 당시 보훈처 심사에서도 ‘행적이 뚜렷하지 않다’며 기각했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강 시장이 ‘광주 정신’까지 언급하며 정율성 논란을 방어하던데, 정말 악랄하다고 본다. 왜 광주 시민과 광주 정신을 들러리로 세우고 방어막을 치는 건가. 광주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좌파 진영은 이승만, 박정희를 평가할 때 공은 공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릴 때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김대중이 했으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나중에 공부해 보니 당시 김대중 공약대로 갔다면 우리나라는 남미처럼 될 뻔했더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지금과 같은 우월한 시장경제와 근대화의 성취는 4분의 3, 5분의 4가 보수 우파 정권에서 일어난 거 아닌가. 이런 사실은 좀 인정하고 갔으면 좋겠다.”
-통영에 윤이상 기념관이 있고, 밀양에 김원봉 공원이 있는데 왜 광주만 문제 삼느냐는 반발도 있었다.
“밀양에 있는 건 김원봉 공원이 아니라 의열단 공원이다. 의열단이 전부 공산주의로 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윤이상 작곡가는 정율성처럼 프로파간다 음악을 한 게 아니고 음악만 떼어놓고 봤을 때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지 않나. 둘 다 정율성과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정율성을 문제 삼는 것을 호남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이는 ‘호남 예외론’ 시각이 여전하다. 이제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남대안포럼이 그래서 형성된 단체인가.
“그렇다. 호남의 특수성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모인 단체다. 회원은 80여 명이다. 저희는 호남이 민주화 업적을 독점하고 성역화하고, 거기에 반대하면 마치 이단처럼 여기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깨려 한다.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있었지만, 부마 항쟁도 그에 못지않게 거센 저항 운동이었다. 4·19 때도, 87 항쟁도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있었는데, 그런 상징을 광주와 호남이 다 가져가는 게 맞느냐는 문제 제기다.”
◇호남·광주 청년들, 더는 허상에 속지 맙시다
평범한 내과 의사는 조국 사태 전후로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젊은 호남 우파 논객’으로 떠올랐다. 그는 “너무 성난 사람들이 나서니 오히려 보는 사람에게 거부감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호남 분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대한 관심을 받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자기들은 회 먹고 일본 삿포로 여행 가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못 누리게 하나요? 그런 악랄한 사람들에게 선동당하지 말자,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우고 독재의 후예가 이끈 나라가 아니라 애국자가 피땀 흘려 일군 기적의 나라라고 쓴 글이 큰 공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언행이 거침없는데 두렵지 않은가.
“내가 광주에서 개업한 의사였으면 못 했을 거 같다(웃음). 연재한 글에도 ‘선생님, 해코지당할까 무섭네요. 항상 조심하세요.‘ 이런 댓글도 있다. 지사 같은 기질이 있는 건 아니다. 군의관 시절부터 스스로 사상, 이념적 공부를 하면서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 논객들의 책을 보니 ‘아, 정말 이 사람들 따라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들이 앉아서 책으로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사상적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조국 사태가 벌어졌을 때, ‘광주가 조국이다’라는 깃발을 보니 더는 참을 수 없더라.”
-어떤 종류의 분노였는지.
“고교 때 선생님이 5·18 주제곡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전교조 설립 활동을 하셨다. 아버지는 천정배 전 의원과 가깝고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대학생 때 운동권 활동에 완전히 빠질 뻔했다. 그러다 스스로 사상이 확고해지면서 ‘그간 내가 겪은 것들이 허상이구나’ 깨달았는데, 그때 큰 배신감을 느꼈다. ‘나를 속였구나!‘라는 배신감. 비상식에 대한 분노보다는 나에게 사기를 친 체계에 대한 복수감에 더 가깝다. 그런 허상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걱정이 크다. 그래서 광주, 호남 청년들에게 ‘너희만큼은 제발 그러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호남, 광주 사람들이 민주당에 이용당하면서 비하받고 욕먹는 것도 너무 싫다.”
-독립이 됐는데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가 됐는데도 아직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역사에서 진실을 배우고 교훈을 얻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건국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역사, 그런 허상에 도취된 사람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홍범도, 김원봉과 동일시하며 ‘부당하게 탄압받는 정의’로 여긴다. 그러니 자신한테 맞서면 다 불의이고 친일파란 식으로 물불 가리지 않게 된다. 단식장 앞에 가서 가위로 경찰을 공격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합리화되는 거 아니겠나.”
◇“호남과 대한민국의 경계 사라지길”
문재인 정권과 조국 사태는 그를 정치적 공론장으로 이끈 발화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라를 잘되게 하려는 욕심과 자기 진영을 잘되게 하려는 욕심이 충돌할 때 나라를 선택했어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한미 FTA, 이라크 파병도 했죠. 제주 강정해군기지도 반대가 심했는데 국가 안보를 위해 밀어붙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걸 존경하고, 우파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지소미아를 파괴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매달려 탈북자를 죽게 내버려 뒀잖아요. 탈원전 정책도 그렇고 자기 진영만 위하는 세력은 절대 집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이 노무현, DJ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지할 건가?
“지금은 이미 사상적으로 우파로 바뀐 상태다(웃음). 노무현 전 대통령과 DJ 모두 대북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분들이 돌아오더라도 그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거 같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 지지 연설을 했는데.
“주변을 보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나는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 않았고 ‘이재명만 막아줘도 생큐’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방향키만 흔들리지 않게 잡고 가도 좋다. 민감한 구조 개혁은 여소야대 국회 지형 때문에 손을 못 대는 상황이다.”
-지금 하고 있는 시민운동의 목표라면.
“호남과 대한민국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호남과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라고 스스로 내세우지도 않고,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지역이 됐으면 한다. 건국을 주도한 김성수, 송진우 같은 호남 정치인들도 재조명되길 바란다.”
-기념 공원 반대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나.
“출구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원 조성하는 곳을 보니 주변을 고르고 자갈밭까지는 깔아놨는데, 거기 생가 한 채만 남아 있더라. 그 근방에서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학교, 병원을 세우고 목숨 걸고 선교한 역사가 있고, 학도 호국단도 호남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그런 기념물들을 넣어 호국 공원, 근대 역사 공원으로 바꾸는 방향이 현실적이다.”
혹시 총선에 출마할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사실 비례의원 등 출마 제의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식이면 그간 해온 제 활동의 진정성이 훼손되잖아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게 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