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아무튼, 주말'이 만 나이 통일법 시행 100일을 맞아 SM C&C에 의뢰한 설문조사한 결과, 실제 일상생활에서 만 나이로 연령을 말한다는 사람은 36.1%로 3명중 1명이었다. 세는 나이를 쓴다는 이는 35.6%로 만 나이 사용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만 나이를 쓰지 않는 경우가 국민 3명중 2명(64%)이란 얘기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사진=오종찬 기자

경기도에 사는 여성 박모씨는 39세다. 원래 세는 나이로는 41세지만, ‘만(滿) 나이 통일법’에 따라 두 살이 어려졌다. “아직 30대라니 기분 좋다”고 한다. 그런데 만 4세인 그의 딸은 “난 네 살 아기가 아니다. 여섯 살로 불러달라”고 한다. 박씨는 “우리 모녀가 서로 다른 셈법을 택해 나이 차도 35세에서 33세로 줄었다”며 웃었다.

벤처 기업을 창업한 남성 김모씨는 1975년 1월생이다. 법적으로 48세인데도 “난 쉰 살”이라고 한다. 종전에 세는 나이에다, 음력 생일이 1974년 12월 ‘범띠’라는 점까지 따져 50세라는 것이다. 김씨는 “내가 학교를 빨리 들어가 동창은 다 1974년생인데, 만 나이를 쓰면 친구들이 형이 돼버린다”며 “업무상 만나는 이들에게도 어려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만 나이 통일법이 지난 6월 28일 발효된 지 100여 일이 지났다. 한국식 세는 나이(출생 연도+한 살), 연(年) 나이(현 연도–출생 연도), 만 나이(출생일부터 계산) 등 세 가지 나이 계산법을 혼용해 생기는 사회·행정적 혼선과 분쟁을 해소하고 국제 표준에 맞춘다며 윤석열 정부가 120대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 작년 법제처 여론조사에선 국민 86%가 “법 통과 시 일상생활에서 만 나이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개정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

법 발효 당시 세계 외신은 “모든 한국인이 하룻밤 새 한두 살씩 어려졌다”며 한국 특유의 세는 나이 계산법을 흥미롭게 보도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 먹고, 전 국민이 1월 1일 일제히 한 살씩 더 먹는 문화는 새삼 해외 토픽이 됐다.

지난해 9월 법제처가 국민 6394명을 대상으로 만 나이 통일법 시행시 만 나이를 쓸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 86% 이상이 "만 나이를 쓰겠다"고 답했었다. 젊어지는 효과가 있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다며 호응이 컸다.

그러나 아직 실생활에서 만 나이는 생각만큼 정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주말’이 이달 초 SM C&C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10~60대 국민 2687명에게 일상에서 어떤 나이를 쓰는지 물어보니 응답자의 36%, 3명 중 약 1명만 “만 나이를 쓴다”고 답했다. “한국식 세는 나이”란 답은 35.6%로 만 나이와 큰 차이가 없고, 연 나이를 쓴다는 응답도 28%가 넘었다. 어떤 식으로든 만 나이를 쓰지 않는 국민이 3분의 2라는 얘기다.

여성은 만 나이(33.26%)보다 세는 나이(39.09%)를, 남성은 세는 나이(31.80%)보다 만 나이(39.14%)를 쓰는 비율이 높았다. 중·고교생인 10대는 세는 나이를 쓴다는 비율이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은 58%로, 만 나이의 두 배에 달했다. 반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연애·결혼 적령기인 20~30대에선 ‘어려지는’ 효과가 있는 만 나이나 연 나이 사용률이 압도했다.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는 40~50대에서는 연륜이 있어 보이는 세는 나이가 대세였다가, 60대에선 만 나이가 다시 앞섰다.

정부는 “새해 떡국이 아니라 생일 미역국 먹을 때마다 나이를 먹는 것”이라며 만 나이 홍보에 힘쓰고 있다. 각 지자체도 법률 개정만으론 부족하다고 보고, 자체 조례·규정을 정비해 만 나이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세는 나이를 끈질기게 쓴다는 방증이다.

만 나이 통일법 발효 직전, 법제처가 일상생활을 비롯한 만 나이 적용 분야와 일부 예외가 적용되는 영역을 설명한 홍보 자료. /그래픽=이동운

이유가 뭘까. 많은 사람이 “평생 세던 나이를 버리고 갑자기 만 나이를 말하려니 어색하고 뭔가 속이는 기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또래끼리는 만 나이, 어르신들에게는 ‘원래 나이’를 말한다”며 “특히 상대가 나이로 대접받으려 하면 나도 세는 나이로 대응한다”고 말했다. 나이로 서열 정하는 문화가 여전하다는 얘기다.

20대 최모씨도 “나이 말하면 사람들이 꼭 ‘만으로요?’ ‘윤석열 나이요?’라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면 ‘그럼 우리 나이론 살이네’ 하더라”고 했다. 술·담배 구입이나 병역 의무 연령은 아직 연 나이를 쓰고, 금융권에선 일명 ‘보험 나이(보험 계약일이 직전 생일에서 6개월이 안 지나면 만 나이를 적용하고, 6개월 지나면 한 살 더함)’까지 통용돼 혼선을 키운다.

만 나이는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민감한 문제다. ‘내가 이 나이를 어떻게 먹었는데 뺏어가느냐’는 정서가 있다. 서울의 초등 1학년 김모군은 부모에게 배운대로 “일곱 살”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친구들이 “우린 여덟 살에 1학년인데 일곱 살도 1학년이라고?” “이제부턴 우리를 누나·형이라고 불러” 하며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이제 김군도 그냥 여덟 살이라고 한다.

만 나이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 나이법이 혼용되며 새로 나타난 흐름은 ‘출생 연도 공개’다. “****년 생, ♠♠띠입니다”식으로 말하고, 상대가 알아서 내 나이를 계산하게 하는 것이다. 우회적으론 대학 학번도 쓰인다. 미국 교포 임모씨는 “최근 한국인 모임을 하면서 서로 나이를 궁금해하다 학번을 공개했다. 내가 ‘98학번’이라고 하자 상대가 ‘제가 재수 97학번이니 두 살 오빠네요’라고 해서 어색하게 웃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만 나이 통일법 발효를 앞두고 서울시민들이 기존 나이와 '어려진' 만 나이를 비교하는 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2010년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바꾼 뒤에도 몇 년은 혼란이 있었다”며, 만 나이도 시간이 지나면 정착될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미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단기(檀紀) 연호를 폐기하고 서기(西紀)를 채택하며 민법상 만 나이 통일법을 시행했지만, 세는 나이는 끈질기게 쓰였다. 60년이 지나도 바꾸지 못한 관습인 셈이다. 북한에서도 1986년 김일성 지시로 만 나이법을 시행했지만 아직 세는 나이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게 탈북자들 전언이다.

세는 나이의 종주국인 중국 등 다른 중화권 국가는 서력을 택하며 만 나이로 모두 통일됐다. 언어학자인 신지영 고려대 교수는 “세계에서 한반도만 세는 나이가 사라지지 않는 건 한국어의 특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우리는 처음 만나면 이름보다 나이부터 묻는다. 나이에 따라 관계와 호칭, 높임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며 “각자의 생일이 아니라 다 같이 나이를 먹는 공통된 기준점(새해)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