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슈트에 은색 가면을 쓴 ‘앤트맨’, 빨간색 거미줄 슈트를 입고 아버지 품에 안긴 ‘스파이더맨’, 가면부터 신발까지 검은색으로 입은 ‘블랙 팬서’....
일요일인 지난 15일 오전 8시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관악대의 연주와 함께 이들이 약 8000명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간다. 좋아하는 마블 캐릭터로 분장하고 여의도공원부터 서강대교를 지나 돌아오는 10㎞ 마라톤 ‘마블런’이다.
히어로물 명가인 마블이 팬들과 함께 즐기는 행사. 공원에 마련된 헐크,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루트와 로켓,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 등 대형 마블 피규어 포토존에는 참가자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다양한 마블 캐릭터 미니 피규어가 전시돼 있거나, 직접 마블 캐릭터로 그라피티를 그려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등에 ‘네 안의 수퍼 히어로를 찾아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행사를 즐겼다.
◇ 父子가 사랑하는 마블
2016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된 마블런은 코로나 사태로 멈췄다가 4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올해는 캡틴마블·블랙팬서·캡틴아메리카·토르·헐크 등 팀 대결로 진행됐다. 러닝해영·짜블리·도도하라 등의 러닝 인플루언서 9명은 특별팀 로키팀으로 참가했다. 1등을 한 캡틴 아메리카 팀원들은 아이언맨 피규어를 받았다. 전체 1등에게는 레고 공인 작가가 특별 제작한 레고 트로피가, 각 팀에서 1~5등에게는 말레이시아 세계 최대 주석 회사인 로열 슬랑오르에서 제작한 로키 캐릭터 트로피가 주어졌다. 행사 참가자들은 마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물병, 피규어와 레고를 받았다. 집결지에서는 마블 레코드 월을 통해 본인의 러닝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블 덕후’들의 축제였다.
올해 특징은 부자(父子) 참가자가 많았다는 것. 국내에 마블 열풍이 강하게 분 것은 2008년 개봉한 아이언맨부터다. 당시 마블과 함께 청춘을 보낸 이들은 이제 아이의 아버지, 한 집안의 가장이 됐다. 나이가 들었다고 취향이 바뀌지는 않을 터. 그 취향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나온 것이다.
네 살 아들과 참가한 송경한(39)씨는 “취미를 공유하고 싶어 아이가 어릴 때부터 아이언맨부터 블랙팬서까지 다 보여줬다”며 “다행히 너무 좋아해 같이 즐길 수 있게 됐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 아이 손을 잡고 야구장에 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마블을 공유하는 세대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부자 참가자들 덕분에 마블런 현장에는 “아버님 멋있어요!” “아빠 힘내세요!” 같은 응원 함성이 울려 퍼졌다.
휴일이라 직장인 참가자도 꽤 있었다. 어릴 적 오락실 게임 퍼니셔로 마블에 입문하게 됐다는 서희영(33)씨는 앤트맨 분장을 하고 마블런에 참가했다. 그는 “평범함 속에 감춰진 영웅적인 캐릭터라 앤트맨을 좋아한다”며 “삶이 힘들 때 과거의 영웅들을 보며 기운을 얻게 된다”고 했다.
◇히어로의 미래는?
그래서일까. 최근 캐릭터 사업은 조부모 지갑을 열 수 있는 아이들과 과거를 추억하는 아버지 세대의 협공으로 최대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를 보면, 2005년 2조700억원대였던 캐릭터 시장은 2019년 12조500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현재는 코로나 정체기를 거쳐 2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지난 13일 패션 플랫폼 무신사와 아티스트 그라플렉스가 협업한 세서미 스트리트 컬래버 제품은 40만원이 넘는 고가에도 일부 품목이 매진됐다.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도 다양한 연령대의 방문객들로 붐볐다. 최모(40)씨는 “세서미 스트리트를 보면 어릴 때 보면서 영어 공부하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열쇠라는 뜻이다.
어른이 유예된 시대라는 말도 나온다. 젊음의 연장이다. 20년 전만 해도 30대 초반 성인이란 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는 게 전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한 새내기다. 현재 국회에서는 청년기본법에 정의된 청년 나이(19~34세)를 최대 만 37~39세로 상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난 13일 국정감사에서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출산도 늦어지고 취직도 늦어지고 결혼도 늦어지는데 국민연금 수급 연령이 늦어지는 것을 반영해 39세 정도로 청년 연령을 가져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고 제안했다.
과거 캐릭터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현재 전 세대를 아우를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히어로물 계보에서는 ‘스타워즈→슈퍼맨과 배트맨(DC)→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마블)’을 이을 영웅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 만화 계보에서도 ‘둘리→심슨→짱구’를 잇는 캐릭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올해로 스물세 살인 걸그룹 에스파의 리더 카리나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도 본인보다 먼저 태어난 짱구 애니메이션의 맹구다.
장기적으로는 캐릭터 산업이 쇠락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최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서부극이 몰락했듯이 수퍼 히어로 무비도 서부극과 같은 방식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히어로물에 기반을 둔 캐릭터 산업의 호황은 지금이 마지막 불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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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다니는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대를 갔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료들과 퇴근 후 한잔하고 싶은데 어디가 맛집인지 모르겠다고요? 친구, 연인과 주말을 알차게 놀고 싶은데 어디가 핫플인지 못 찾으시겠다고요? 놀고 먹는데는 만렙인 기자, 즉흥적인 ENTP이지만 놀러갈 때만큼은 엑셀로 계획표를 만드는 기자가, 직접 가보고 소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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