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마포의 한 재래시장에 진열된 샤인머스캣. 2kg들이 한 상자에 1만원대 초반으로, 평년 가격의 '반의 반 토막'이 났다. 재배 농가 급증으로 공급량이 폭증했다. /정시행 기자

손에 잡히는 모든 물가가 올라 장 보기 두려운 요즘, 드물게 가격이 역주행하는 품목이 있다. 샤인머스캣 포도다. 한때 ‘과일계의 에르메스’로 불렸던 샤인머스캣은 해마다 가격이 반 토막 나며 만만한 대중 과일이 됐다. 인플레 시대의 효자인지, 농가를 위협하는 뇌관인지 논란도 일고 있다.

샤인머스캣은 2021년까지만 해도 한 송이에 2만원 안팎, 2kg들이 한 상자에 4만~5만원을 호가하는 비싼 과일이었다. 백화점에선 애플망고·핑크딸기 등과 더불어 고급 선물용 과일의 제왕으로 꼽혔다. 샤인머스캣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한 2017~2018년엔 “마트 개점 전부터 기다려 오픈런으로 샀다” “드디어 먹어봤다”며 연예인부터 시민들까지 소셜미디어에 시식 인증샷을 올리는 게 유행했다.

처음엔 “망고나 복숭아, 솜사탕 맛이 난다” “청포도 사탕의 신선 버전” “포도계의 아이돌”이라는 품평이 잇따랐다. 껍질이 얇아 통째 먹을 수 있고, 씨 없고 신맛이 적어 어린이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이 달리자, 일부 상인이 일반 청포도를 샤인머스캣이라 속여 파는 일도 속출했다.

그러다 가격 폭락이 시작됐다. 농협과 서울 가락시장 데이터에 따르면, 샤인머스캣 제철인 9월 초 평균 소매가는 2021년 2kg당 3만8000원→2022년 2만3000원→올해 1만3000원으로 매년 약 40%씩 뚝뚝 떨어졌다. 10월 현재 시장에서 1만원이면 박스째 살 수 있다. 송이당 3000~6000원 선이다.

지난 9월 추석 직전 울산 삼산 도매시장 모습. 현재 샤인머스캣은 국내 포도 품종 중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존의 대세 품종이었던 캠벨이 다시 귀해지면서 캠벨과 샤인머스캣의 가격이 처음으로 비슷해졌고, 시중에선 캠벨이 더 비싸게 팔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뉴스1

샤인머스캣은 과일 중 거의 유일하게 몸값이 떨어졌다. 기존 대세 포도 품종이었던 캠벨얼리나 거봉의 올해 가격이 평년 대비 30~40% 뛴 것과도 대비된다. 10월 16일 현재 농수산식품유통공사 통계상 가장 비싼 포도는 거봉이고, 샤인머스캣과 캠벨은 처음으로 비슷한 가격이 됐다. 실제론 캠벨이 귀해져 샤인머스캣 값을 제치기도 한다.

30대 주부 차모씨는 “애들이 샤인머스캣을 좋아하는데 가격 부담이 적어져 다행”이라면서도 “너무 흔해지니 선물용으론 피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추석 차례상에 사과 대신 샤인머스캣을 올렸다” “집에서 탕후루 만들려고 산다”고도 한다. 예찬론은 예전만 못하다. “처음 나왔을 때만큼 맛있지 않다” “품질이 들쭉날쭉, 맛이 복불복이다” “너무 달기만 해 질린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농가들이 대거 샤인머스캣 재배에 뛰어들어 생산량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2016년 경북 일대 278ha(헥타르)였던 샤인머스캣 총 재배 면적은 전국으로 확대돼 7년 만에 6577ha로 24배 커졌다. 캠벨·거봉을 키우던 농가가 돈이 되는 샤인머스캣으로 갈아타면서, 재배 면적 비중은 샤인머스캣(43%)이 캠벨(30%)을 앞서고 출하량은 서너 배나 많다. 각지의 과일 공판장에 유입되는 과일의 절반이 샤인머스캣이라고 한다.

그래픽=송윤혜

그러자 샤인머스캣 농가들은 지난해부터 재배·수확 기준을 지키지 않고 서둘러 시장에 먼저 내보내는 경쟁을 벌였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이상하게 맛이 떨어졌다”는 말이 돌며 위상은 더 추락했다. 샤인머스캣 품종을 1988년 처음 개발한 일본에서도 초반 인기만 보고 공급을 너무 늘렸다가 최근 10년간 가격이 60% 떨어졌는데, 똑같은 일이 한국에선 더 압축적으로 일어난 셈이다.

농가들은 “샤인머스캣이 박살나 줄도산할 판” “포도 산업 위기”라며 뒤숭숭하다. 2021년 샤인머스캣 재배를 위해 귀농한 박모씨는 “2년 전 묘목 구하러 전국을 돌며 웃돈까지 줬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내년에나 첫 출하를 할 텐데 인기는 식고 가격이 너무 떨어져 걱정이 크다”고 했다. 과수 특성상 묘목을 뽑아내지 않는 한 수확을 계속해야 해, 갑자기 품종을 바꾸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각 지자체는 샤인머스캣 홍보와 수출 확대, 주스·젤리·빵 등 가공식품 개발을 지원하며 대책을 마련 중이다. 샤인머스캣의 흥망이 고령화, 수익성 악화 같은 한국 농가의 구조적 문제를 더 악화시킬 위험도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