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행방불명됐다고 주장해온 경복궁 영추문 소문(小門)이 자경전 동쪽 담장에 온전하게 서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추문 소문이 박혀 있는 자경전은 경복궁 관리소에서 140m 떨어져 있다. 1926년 붕괴된 영추문은 1975년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문화재청은 영추문 부재가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이 같은 사실은 경복궁 연구가인 권영민씨 추적 끝에 드러났다.
영추문의 탄생과 종말과 부활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 서쪽 대문이다. 사연이 많은 문이다. 태조~세종 사이에 건축됐고 세종 때인 1426년 집현전 학자들이 영추문이라 명명했다.(1426년 음10월 26일 ‘세종실록’ 등) 임진왜란 때 사라진 영추문은 고종 시대인 1865년 음11월 4일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단청을 올리며 재건됐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 서울역사편찬원, p295)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음력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이 문을 부수고 경복궁에 난입해 왕실 수비대인 시위대와 전투를 벌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은 잡초 무성한 빈집으로 변했다. 13년 뒤인 1909년 양력 3월 6일에는 영추문 담장에 ‘한국 정부의 제공(諸公)은 부귀영화를 일삼고 국고의 봉급을 받으면서도 일본인에 고용됨을 면치 못한다’며 정신 차리고 궐기하라는 의병 통고문이 나붙기도 했다.(‘통감부 문서’ 6-1-164. 경복궁 영추문 장벽에 첩부된 의병 통고문 송부 건)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5월에는 경복궁 내 건물 4000여 칸이 경매로 넘어갔다.(황현, ‘매천야록’6, 68.경복궁 건물 경매, 국사편찬위) 1911년 5월 17일 옛 황제 순종은 이왕직을 통해 경복궁 부지를 총독부에 넘겼다.(1911년 5월 17일 ‘순종실록 부록’)
식민 시대인 1923년 10월 3일 영추문 앞으로 전차 노선이 개통됐다.(1923년 10월 1일 ‘매일신보’) 이 노선이 며칠 전 복원 공사를 마친 고종 시대 광화문 월대 위를 지나간 노선이다. 운행 3년 만인 1926년 4월 27일 오전 9시 55분 갑자기 영추문 문루와 북쪽 담장이 붕괴됐다. 문루 아래에서 놀고 있던 이귀백이라는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흙과 돌에 파묻혔다가 지나가던 ‘조선신문’ 배달원 이청산에게 구조됐다.(1926년 4월 28일 ‘매일신보’, ‘조선신문’) ‘매일신보’는 “늘 왕래하는 전차 탓에 성벽이 울리어 결국 무너진 듯하다더라”라고 보도했다. 한 달만인 1926년 5월 영추문은 전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작은 출입문이 들어섰다.
1975년 박정희 정부 때 영추문이 복원됐다. 사라진 지 49년 만이다. 그해 8월 30일 준공식을 가진 영추문은 흙과 돌 대신 콘크리트를 사용해 복원됐다. 원래 영추문 자리 안쪽에 군부대가 주둔한 탓에 위치도 50m 북쪽으로 이동했다. 문화재청은 향후 영추문을 원위치에 제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여기까지가 영추문의 시말과 미래다.
종적을 감춘 영추문 월문(月門)
북쪽 담장 붕괴 직후 영추문은 통째로 철거됐다. 영추문 단청 작업 한 달 전에 완공된 문루 위쪽 두 ‘월문(月門)’도 사라졌다. 월문은 아치형 출입구에 벽돌로 쌓은 작은 문[小門]이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동문인 건춘문에는 월문이 남아 있다. 남쪽인 광화문에는 석문(石門)이 문루 양편에 서 있다.
영추문 월문 출입구 위쪽 양편에 봉(鳳·봉황 수컷)과 황(凰·봉황 암컷)이 새겨진 부조가 붙어 있다. 신무문 월문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봉은 꼬리가 화려하고 황은 화려함이 덜하다. 그런데 1975년 복원된 영추문 남북 월문에는 꼬리가 똑같이 화려한 수컷 ‘봉’만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봉과 황이 아니라 봉과 봉으로 잘못 복원된 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소장했던 유리건판 사진이 보관돼 있다. 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각목들로 떠받치고 있는 벽돌문 사진이 있는데, 제목은 ‘영추문 소문 측면’이다<사진1>. 소장품 번호는 ‘건판008642′이다. 박물관이 적어넣은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복궁 영추문루 소문 측면. 바닥에 내려놓은 영추문 위의 작은 벽돌문이다. 영추문은 1926년 4월에 석축 일부가 무너져 내려 그후 문루 전체를 헐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이 벽돌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과연 그럴까. 과연 박물관 설명처럼 영추문 월문은 행방불명일까. 경복궁 연구가 권영민씨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체불명 벽돌문
근정전 북동쪽에 있는 자경전(慈慶殿)은 조 대비 거처용으로 고종 때 만든 건물이다. 실제로는 고종이 사람을 만나고 강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됐다.(이왕무, ‘경복궁 자경전 ‘서수(瑞獸)’의 고찰’, 역사민속학 48,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 담장 가운데 서쪽 꽃담과 북쪽 십장생 굴뚝이 유명하다.
그런데 동쪽 담장에는 전혀 자경전 분위기와 맞지 않는 문이 하나 붙어 있다. 1990년대 나온 각종 경복궁 복원 관련 보고서부터 2023년 10월 현재 나와 있는 경복궁 안내서 어디에도 이 문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정체불명이다.
이 문을 만든 재료가 벽돌이다. 그리고 아치형 출입구 위쪽 양편에 봉(鳳)과 황(凰) 부조가 마주 보는 방향으로 설치돼 있다. 맞다. 영추문 문루에 있었던 월문과 형태가 똑같다. 그렇다면 각목으로 받쳐놓은 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속 영추문 월문과 어떤 관계일까.
권영민씨는 “그 문이 바로 이 문”이라고 했다. 영추문 월문(소문)은 중앙박물관 설명과 달리 행방불명된 적이 없었다. 월문은 1926년 4월 영추문 붕괴 이후 2023년 10월까지 단 1초도 실종된 적 없이 바로 이 자경전 담벼락에서 해방을 맞고 전쟁을 목격했고 광화문광장에서 환호하는 붉은악마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영추문 남북 월문 가운데 북쪽 문이다. 중앙박물관에 있는 ‘영추문 문루 남면(南面) 소문’ 사진에는 아치문 양쪽에 있는 봉황이 마주 보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빼박’ 증거, 사진과 기록
<사진1>과 <사진2>를 비교하면 명확하다. <사진1> 속 벽돌문 뒤편으로 건물이 보인다. 벽돌문 바로 위쪽으로 지붕 끝부분 장식인 용두(龍頭·용머리)가 보인다. 2023년 10월 현재 자경전 벽돌문을 촬영한 <사진2>와 비교하면 이 자경전 용두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니까 사진1은 붕괴된 영추문을 철거한 뒤 문루 북쪽 소문을 자경전 현 위치로 이전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장소도 동일하고 문 자체도 동일하다. 아치형 출입구 위쪽 양편에 ‘봉’과 ‘황’이 새겨져 있는 것도 똑같다. 이 문이, 그 문이다.
자경전은 1915년 총독부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공진회 사무실로 전용됐다. 행랑은 창고로 사용됐다.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 사무실, 조선박람회 사무실 따위로 해방 때까지 사용됐다. 경복궁 건물들은 대부분 식민 시대 철거됐지만 자경전과 부속 건물은 이런 연유로 살아남았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1929년 ‘조선박람회장 배치도’에는 자경전 동쪽과 남쪽에 ‘산업북관(産業北館)’ 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 부지 평면도’에는 박람회용 건물들이 철거돼 있다. 두 지도를 겹치면 신축된 자경전 동쪽 담장과 산업북관 전시관 외벽 위치가 일치한다. 그러니까 영추문 월문이 산업북관 전시물로 고정돼 있었다가 전시관 철거 후 자경전 담장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가운데 ‘영추문(迎秋門) 소문(小門) 이전 건’이라는 문서가 있다. 대정(大正) 15년(1926년) 5월 27일 조선총독부 종교과장이 결재한 영추문 처리 보고서다. 관리 번호는 ‘D012-013′이다. ‘금번 해체한 영추문 재료 가운데 소문만은 고적 자료 제공을 위해 그대로 이전 보존을 고려한다’라고 적혀 있다. 자경전 담장에 있는 벽돌문이 영추문 월문임은 이렇게 사진과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또 대들보 용두를 비롯해 부재 8건은 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한다는 문서가 첨부돼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출처 불명 용두(유물 번호 ‘경복209′)를 비롯해 국립박물관 목록을 찾으면 영추문 용두가 나올 확률이 크다.
경복궁 관리소에서 월문까지 140m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부서진 부자재의 소재는 알지 못하며 다만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추문 월문이 있는 자경전 남동쪽에 경복궁관리소가 있다. 궁능유적본부 소속으로 경복궁을 관할한다. 사무실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속건물이다. 그 관리소 건물에서 자경전 담장에 붙은 월문까지 거리는 140m다. 1-4-0-m. 영추문 월문은 이전한 지 근 100년째 그곳에 무명씨(無名氏)로 서 있다.
자경전 월대 아래에는 돌로 만든 서수(瑞獸) 한 마리가 기단에 앉아 있다. 전차 개통과 함께 철거된 경복궁 서십자각 서수다. 담장 속 벽돌문과 함께 자경전과는 아무 역사적 관련이 없는 석물이다.(이왕무, 앞 논문)
역사적 근거 없이 상상력으로 ‘조선왕조 내내 소통 공간이었다’라며 진행한 광화문 월대 공사 같은 일이 또 벌어져야겠는가. 경복궁 복원은 2050년대까지 계속될 대역사다. 타향살이 석물들, 영추문 월문과 서수도 마찬가지다.